애인실격

모든

 열받는다. 진짜 열받는다. 처음에는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머리 끝까지 열받아서 그냥 골프채만 미친 듯이 휘둘렀다. 아직 셔누형이랑 결혼도 못했는데. 아니, 그 긴 시간 동안 서로 삽질(은 아니고 혼자만의 짝사랑) 했던 시간이 끝나고 이제 막 셔누형이랑 사귀기 시작했는데. 마침 유닛도 준비하고 활동하면서 일과 사랑, 사랑과 일. 너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던 나에게... 이게 뭔 개똥 같은 일이냐고!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차올랐다. 휘두를 때마다 퍽, 빡, 뽀각과 같은 둔탁하고 인상이 찌푸려지는 소리가 났다. 몰라, 나도. 그냥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고 나는 셔누형이랑...!

“형원아...!! 형원아!!!”

 귀에 꽂히는 낯익은 목소리를 쳐다보니 셔누형이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셔누형만 나한테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우리, 괜찮은 거지. 아직은. 형은 안 다친 것 같고…..

“야.. 야.. 형원아… 어디 다쳤어?”

 내가 먼저 어디 다쳤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오늘도 형이 먼저 물었다. 형은 안 다쳤냐고, 어디 긁힌 데라도 있냐고 물어보려는데 숨이 턱 막혀서 헉헉거렸다. 그래도 그동안 운동 좀 했다고 주저앉지는 않았다. 골프채는 끈적이는 액체가 잔뜩 묻어 줄줄 흘렀고 조금 휘었다. 튼튼하네. 다행이었다.

 내 어깨를 붙잡은 형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장갑 좀 끼라니까. 너덜너덜해져서 구멍이 크게 난 장갑도 도움은 어느 정도 될 건데. 열받았던 마음이 한순간에 화르르 타버리고 재가 되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여기 있지 말고, 다른 데로 가자.”
“어디로요?”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어요, 형?

“글쎄, 어디든. 어디든 가자."





 폭력적인 소음이 가득했던 주변은 어느새 고요해지고 셔누형과 나는 처참한 거리를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움직이는 것은 우리 둘뿐이었다. 움직이는 생명은 무엇이 되었든 달갑지 않았다. 저벅저벅 걷는 형의 익숙한 움직임 소리만이 긴장감을 조금 낮춰주었다. 시동이 꺼진 차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의 꽉 막힌 차량 정체처럼 줄줄이 서 있는 차들을 밀어내며 차를 끌고 다니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차는 이동하기에도, 우리를 보호하기에도 매우 적당한 수단이었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형, 근처에 오토바이 있어요?"
"오토바이?"
"네, 그게 더 빠르게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근데 차가 더 안전하지 않아?"
"그렇긴하져.. 아무래도..."
"음..."

 셔누형은 짜장면과 짬뽕 중 하나만 골라야 했던 점심 메뉴에 진심인 연습생인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생명과 직결된 선택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나는 셔누형의 고민 가득한 입술에 자꾸 시선이 갔다. 앞으로 이 세상에서 형과 함께 살아간다는 점이 제법 기분 좋게 다가왔다. 망하랄 때는 안 망하고. 그래도 세상이 망하니까 좋은 것도 있긴 해. 우리가 이 거리를 손을 잡고 함께 뛰어도, 지금처럼 고민하는 셔누형의 입술에 촉, 하고 입을 맞춰도 그 누구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 세상이라는 게.

"아, 모야"
"푸흐흐.. 형은 차가 좋을 것 같아여?"
"근데 형원이, 네 말도 맞기도 해서 고민되네."
"그럼 갈 방향을 일단 정하고, 그 앞에 있는 차 중에 골라볼까여?"
"그래! 저쪽으로 가보자."

 내가 생각해냈지만 진짜 똑똑해 보이는 해결 방안인 듯. 형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어깨가 자꾸 하늘로 치솟았다. 셔누형의 손에 잡힌 내 손을 내려다봤다.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영화 같아. 로맨스든, 액션이든, 호러 스릴러든 상관없다. 형이랑 함께하는 영화의 장르는.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아직 마땅한 차를 찾지 못한 우리에게는 여름의 긴 낮이 다행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도시에서는 얇은 햇살 한 줄기라도 큰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셔누형이 크고 튼튼한 SUV 차량 몇 대를 찾았지만 앞 유리가 뚫려있거나 어딘가에 돌진해 부딪혀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형은 최대한 괜찮은 차를 골라야 타는 의미가 있다며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나는 한참을 형 손을 잡고 형이 보는 차를 대충대충 보았는데, 슬슬 셔누형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고 곁에서 잠시 떨어져나와 본격적으로 둘러보았다.

 옆에 살짝 긁힌 것 빼고는 멀쩡한 아반떼가 보였다. 시동도 걸어보니 잘 걸린다. 기름...은 다 떨어지면 그때 가서 갈아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셔누형! 이거, 여기! 순식간에 옆으로 온 형도 괜찮겠다며 운전대를 잡는다. 빨리 타, 형원아. 차를 둘러보면서 움직일 수 있는 차는 밀어내 길을 텄기에 아반떼 정도는 수월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바로 옆에 앉은 나는 며칠 동안 같은 옷을 입고, 씻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무리 우리가 땀 냄새 맡으며 생활했어도,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인데... 꼬질꼬질한 모습은 멋지지 않을텐데... 무대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그 난리가 벌어지는 바람에 예뻤던 마린룩 의상은 거지꼴이 된 지 오래였다. 화사했던 메이크업도 땀에 절어 번졌다. 그래도 주황빛 노을로 더 그을린 형의 얼굴은 멋있기만 했다. 다음 목적지에서는 샤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음...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눈을 뜨니 주변은 어둡고. 셔누형은?

"혀엉.. 셔누형"

 차 문을 여닫는 소리도 조심스러웠다. 밖에 있던 형도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왔다. 일어났어? 하루종일 땀을 흘리며 운동(?)을 했더니 고단했던 탓이다. 잠에 취해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혀엉. 여기 어디에여? 일단 차에 타봐. 네.

 차가 있으니 오늘 잘 곳은 그나마 안심이었다. 형은 근처에 텅 빈 집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다리도 제대로 못 뻗는 좁은 차 안 보다는 발 뻗고 잘 수 있는 집이 좋긴 했다.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조금 안심하고 차에서 나와 형의 뒤를 따라 걸었다. 요 며칠은 형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많이 보는 것 같다. 어떤 모습은 영원히 봐도 질릴 것 같지 않다.

 오늘은 운이 매우 좋은 날이다. 잠겨있지 않은 집에, 차가운 물이지만 씻을 수 있는 물이 나온다는 점이 제일 좋았다. 여름이니까 찬물 샤워 시원하게 하지, 뭐. 물이 중간에 끊길 수도 있으니 일단 형을 먼저 들여보냈다. 빨리 씻고 나올게. 엇...? 아니 천천히 씻어도 되요. 너도 씻어야 되니까~ 아니... 땀에 절은 옷을 순식간에 벗어던지고는 후다닥 들어간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 하면 반칙인 거 아니야...? 내가.. 내가 잘못된거지...? 후끈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입을 만한 옷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서랍을 열어보니 남자 옷이다. 이것 봐. 오늘 진짜 운이 좋다니까. 깨끗한 옷을 준비해서 화장실 문 앞에 두었다. 제일 중요한 음식. 먹을 만한 게 있는지 찾아보니 베란다에 생수가 몇 개 있었다. 인스턴트 식품도 많았다. 햇반, 라면, 스팸... 현대인의 필수품인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며칠 묵자고 해야지. 제대로 먹지 못해 얼굴이 반쪽이 된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해?"
"으악, 깜짝이야."

 덜 말린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톡, 목덜미에 떨어졌다. 놀랐어?ㅎㅎ 푸스스 웃는 모습에 덩달아 웃었다. 여기 뭐 먹을 게 많네? 다행이다. 며칠 좀 있다가 가도 되겠다, 그치? 이제 너두 씻고 와~ 너두 꽤 꼬질하다, 야 ㅎㅎ 아이참, 알겠어요... 근데 자꾸 이상하게 들린다니깐...

 오래 씻을 여유 따윈 없었다. 차가운 물에 대충 꼬질함만 씻어보내고 나왔다. 아직 모든 시설이 망가진 건 아닌지, 다행히 전기가 들어오는 빌라였지만 밝은 빛을 보고 따라올 수 있기 때문에 거실이나 방의 큰 불은 형광등은 켜지 않았다. 거실 테이블에 작은 조명과 그 옆의 반쯤 녹아내린 초가 놓여있었다. 이 집에 있었던 사람도 우리와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우연히 들어온 이 집은 우리가 당분간 지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죄송한 마음이었지만 집주인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싶을 정도로....

 대충 라면 한봉지씩 씹어먹고 나니 또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말수가 적어진 나를 눈치채고 형이 침대로 이끌었다. 여기서 자. 형은? 나는 이불 깔고 바닥에서 자도 되고, 소파에서 자도 되고. 그냥 같이 여기서 자요. 나를 여기에 두고 다른 데서 잔다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편하게 자라고~"
"형이 여기 있어야 편해요, 내가."
"침대 작아 보이는데...?"
"그래도 바닥보단 나을 것 같아요. 제가 더 안쪽으로 들어갈게요."

 최대한 안쪽으로 몸을 몰아세우고 형이 편하게(아마도) 누울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었다. 팔베개도 해줄까여? ㅎㅎㅎ 아니 됐어, 무슨 팔베개야. 팔 저려, 하지마~ 그럼 손바닥이라도.. 됐다니깐ㅎㅎ 자자. 오늘은 푹 자고, 일어나자.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내일의 불확실성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을 하는데 형이 이렇게 말해줄 때마다 잠시 생각의 문을 닫을 수 있어서 좋았다. 답은 항상 간단한데 말이다. 걱정은 내일 일어나서 해도 돼. 형이 해주는 말은 다 안심이 된다. 잘 자요, 형. 내일 봐.





* * *





 갑자기 꿀렁하는 침대의 움직임에 눈을 뜨니 셔누형이 일어나서 뒤뚱거리며 베란다로 걸었다. 그쪽에 놓인 생수 한 병을 들고 목을 축이고는 창문 밖을 주시한다. 아침해가 떴고, 또 하루가 시작되는데 몸이 자꾸 침대로 끌어당겨진다. 은은한 잠에 자꾸만 몸이 묶인다. 24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아늑한 이 곳에 익숙해져 원래의 일상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상체를 일으킨 채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꿈뻑꿈뻑 눈을 떴다 감고 있으니까 형이 침대에 다시 눕혀줬다.

"더 자도 될 것 같아."
"밖에 좀비 없어여?"
"있긴 한데... 가까이에는 없구. 쩌어 멀리."
"글쿠나.. 웅.."
"우리 여기서 같이 살까?"
"... 웅...?"

 잠결에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형이 붕 뜬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물었다.

"우리 여기서 영원히 같이 살래?"
"그래여... 여기서 살자..."
"그래 ㅎㅎ 너 프러포즈 승낙한 거다?"
"우웅...???????????"

 아니 그게 어떻게 프러포즈야아아!!! 소리치며 벼락 맞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자 형이 쉿쉿!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줬다. 이상한 소리 해놓고 왜 나보고 조용히 하래?!!! 이 형, 진짜 웃긴 형이야!!! 그리고 자고 있을 때 누가 그런 얘기를 해요, 무드 없이! 진짜... 나는.... 나는....

"말도 느린 애가 무슨 말을 랩처럼 하냐 ㅎㅎ"
"아니. 형이 프러포즈라고 하니깐 글치!!!"
"같이 살자는 말이 프러포즈지 그럼."
"아니... 그 말을 내가 하고 싶었다고요........"

 속상함, 억울함, 황당함, 짜증남... 이 다 섞인 감정은 뭐라고 하지? 목에 뭔가가 꽉 막혀있는 것 같다.

"다시 해, 다시!"
"다시? 알았어 ㅎㅎㅎ 같이..."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단 말이에요!"
"알겠어, 형원아 말해봐."
"형.. 셔누형.. 나랑.."
"응."
"나랑.."
"응."
"... ㄱ.. 결혼..."
"결혼해줘?"
"아니 말하지 말라니까아안~!"

 진짜 엉망진창 프러포즈잖아... 나는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아니면 집에서 뭐라도 준비해서, 아니 적어도 반지라도 사두고 프러포즈 하려고 생각했는데. 어떤 반지를 고를지 고민만 하고 사놓지 않았던 게 이렇게 후회가 될 줄은 몰랐다. 아무 반지라도 사두고 다음에 더 좋은 반지로 바꾸자고 할걸. 차라리. 차라리 빨리 사서 어디든 숨겨 놓을걸. 망했어... 형 손을 잡고 침대에 팡팡 내려치면서 소리치는 걸 대신했는데, 양손으로 잡고는 빤히 쳐다본다. 몰라, 진짜.

"응, 형원아, 너랑 결혼할게."

 까만 두 눈이 시선을 맞춰오는데,
그거 진짜 반칙이야.

"네, 나랑 결혼해 주세요..."

 나는 속절없이 고개만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니까.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몽롱한 현실에 취한 채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간단히 먹는 스팸밥도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형과 나는 집에서 밖을 주시하며 며칠 전의, 그러나 까마득한 무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뜨거워서 녹아 내릴 것 같던 무대의 열기,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함성, 대기실에서 먹다 남긴 샐러드가 아깝다는 얘기들... 어느새 집 안에 스며들어 오는 금빛 노을이 오늘을 완벽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삐뚤어진 모양새의 검은 그림자.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는 좀비가 나타났다. 지금은 하나뿐이지만 이대로라면 근처에 계속 몰릴 위험이 있다. 멀리 떨어져 있기에 방심했던 탓이었다.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소리에 민감한 놈들이라 작은 소리라도 날까 까치발로 방에 들어갔다. 형과 나는 우리가 입을 옷을 백팩에 몇 개 집어넣었다. 아차차, 물과 음식도 챙겨야지. 베란다에서 챙겨온 것도 꾸역꾸역 백팩에 넣고 에코백에도 넣을 수 있을 만큼 넣었다. 엇, 어깨에 둘러메고 살짝 휘청인 거 형은 못... 봤겠지..?

"형원아, 다 챙겼어?"
"네, 다 챙겼어여."
"차까지만 이동하면 될 거야."
"아, 형 잠시만요."

 싱크대 위에 걸려있는 고무장갑을 챙겨 형에게 끼워주었다. 왼쪽은 너 하라는 형한테 형이 매번 앞에서 날 챙겨주는 일이 많으니까 양쪽 다 해야 한다고 우겼다. 빨간 고무장갑을 낀 형은 조금 뚱한 표정으로 야구방망이를 고쳐잡았다. 그런 얼굴을 정말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셔누형.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눈에 들어온 건 솜 베개였다. 그럼 이거 방패 대신 갖고 갈게요. 안 물릴 것 같지 않아요? 팔을 붕붕 휘두르며 스파르타 병사처럼 자세를 잡으니 송곳니를 빼꼼 보이며 눈이 접히게 웃는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웃음. 나는 저 웃음을 자꾸만 보고팠다. 보고 있어도, 항상.

쪽.
"...뭐야 ㅎㅎㅎ"
"오늘도 힘내자구여!"

 언제 나가면 좋을지 타이밍을 확인하는 셔누형의 귓가가 붉었다. 새빨간 귀를 한번 봤다가, 셔누형이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같이 밖을 보며 나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집중, 해야지. 코앞까지 좀비가 왔던 상황이 한 두 번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긴장은 심해졌다. 끝이 언제일지 모르는 나날들의 연속이라 항상 신경이 곤두섰다. 더군다나 옆에 있는 건 형이니까. 근데 난 형한테 의지가 안되는 것 같아서... 일단 중요한 건, 지금 이 위기를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가는 거니까 정신 차리자.

 1층이 장점은 문을 열고 조금만 가면 우리가 타고 왔던 이동 수단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1층의 단점은 쉽게 좀비가 어슬렁 거릴 수 있다는 점이다. 나중에 셔누형이랑 살 집은 1층은 제외야. 하나밖에 없던 좀비는 천천히 우리 집 근처를 걸어 다녔다. 후각과 청각이 예민한 녀석들이라 좀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우리가 나갈 타이밍이었다. 좀 빨리 걷던가. 좀비가 왜 그렇게 느긋해? 좀비가 저렇게 늑장을 부려도 되는 거야? 답답함에 좀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우, 형원아. 나 뚫어지겠어." 아니, 형 쳐다본 게 아니란 말이에요. 억울해.

"형, 이제 나가도 될 것 같지 않아여?"
"웅, 신발 신었지? 나가자."

 무대 의상을 그대로 입고 도망쳤던 탓에 구두를 신고 뛰어다녔는데. 길에서 하나씩 맞는 신발을 찾아 신어 네 짝 모두 디자인이 전부 달랐다. 모래 먼지에, 핏자국에 더러워진 운동화였지만 처음 맞춘 커플 운동화처럼 맘이 갔다. "지금이야." 고개를 끄덕이자 삐리릭- 도어락 소리가 났다. 좀비들의 웅웅 대는 소리가 안개처럼 깔려있는 틈에서 인위적인 기계 소리에 저 멀리 갔던 좀비가 다리를 질질 끌며 몸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집에서 보았던 좀비와는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건 주차해두었던 차 근처에 있는 좀비였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어디서 뭘 갖고온건지 우걱우걱 씹고 있었다. 쫓아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셔누형이 다가가 가차 없이 야구방망이로 내려쳤다. 수박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나며 깨끗이 씻었던 얼굴에 보라색 피가 튀었다. 눈가에도 튀었는지 눈을 찡그리고 있는 셔누형의 뒤로 혀를 쭉 내밀고 달려오는 좀비가 보였다.

 셔누형이 휘두른 것처럼 골프채를 휘들렀다. 빡, 소리가 나고 머리에서 액체가 줄줄 흘렀지만 좀비는 죽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는지 거리가 있었던 좀비 몇 마리도 우리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다시 골프채를 휘둘러 좀비를 날렸다. "형, 차 문 열어요!" 내 목소리와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고요한 거리에 사이렌처럼 퍼졌다. 곧 있으면 이 근처를 배회하던 좀비들이 이 소리를 듣고 더 몰려올 것이다. 운이 좋으면 몇 마리 없을 테고, 운이 나쁘다면 떼로 몰려오겠지. 조급해진 마음에 서둘러 차에 탔다. 운전석에 앉은 셔누형이 엑셀을 밟았다. 백미러로 보이는 좀비들이 모래알만큼 작아지며 사라지자마자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우리 앞을 막고 있는 건 대각선으로 놓인 하얀 포터였다. 차는 텅 비었지만 좀비로 인해 혼비백산하며 도망치는 사람들의 전쟁통 같은 모습 덧대여 보여졌다.

"집에... 있을 걸 그랬나...?"
"형원아, 내가 갔다 올게."
"저 포터에?"
"응, 시동 걸리는지 보고 올게."
"같이 가여!"
"시동 안 걸리면 이걸로 밀고라도 가야 되니까 여기 있어."

 일단, 좀비가 없는 것 같으니까 빨리 갔다 올게. 응?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형의 손목을 잡고 그래도 가지 말라는 표정, 더하기 셔누형이 제일 맘 약해지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형 말을 잘 듣는 나라고 해도 나는 형이 위험한 곳에 안 갔으면 좋겠단 말이에요.

"그럼 이 차로 그냥 밀고 가면 되잖아여..."
"지금 시간 있을 때 빨리 갔다 올게. 이럴 시간 없어."
"혀엉.... 셔누형..."
"여보, 갔다 올게. 기다려~ 응?"

 잡은 내 손을 잔인하게 털며 달콤한 말을 내뱉는다. 어엉?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를 쫑긋거리는데 후다닥 저 앞으로 달려간다. 여보, 라고 했다.....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기며 형이 했던 말을 구간 반복하듯 계속 되뇌였다. 여보라고 했다... 여보... 여보... 여보... 구름에 앉은 느낌이 이런 건가. 푸흐흐. 웃음이 입술 끝에 걸려 내려오지 않는다. 살짝 멍해진 채로 형이 움직이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지. 챱챱, 양 볼을 치며 긴박한 상황임을 상기시켰다.

 길을 막아선 포터의 뒤 꽁무니에서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시동이 걸리는구나. 열기가 가득 찬 엔진 소리를 기점으로 더욱 주변을 날카롭게 지켜보았다. 차가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움직였다. 걸리적거리는 차들이 부서지며 소음을 내자, 좀비들의 이상한 울음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아까 우리를 쫓아오던 좀비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는데 오른쪽에서 시커먼 것들이 형이 타고 있는 차로 달려들고 있었다. 형!!!! 셔누형!!! 골프채를 들고 반사적으로 형이 있는 곳으로 튀어 나갔다. 조수석 쪽에 거머리처럼 붙어있는 좀비를 힘껏 내리쳤다. 트럭이 더 빠른 속도로 제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분명 셔누형도 좀비를 봤을 거다.

"형! 운전 계속해요! 알아서 탈게!!!"

 분명 좀비 머리를 내리쳤고, 뭔가 물감처럼 팍 번졌는데도 이상한 움직임으로 살아있다는 게 지겹게 느껴진다. 자꾸만 셔누형 쪽으로 움직이려는 좀비가 너무 열받는다. 한 번만 내리쳐도 죽어라, 쫌!!! 나는 원래 화가 많은 편이 아니지만 셔누형과 연관되면 자꾸 속에서 울컥한다. 활화산 하나를 키우고 있는 것 같아. 반쯤 잘린 머리를 한 대 더 날리니 뚝 끊기며 데구르르 굴러간다. 그리고 동시에 뒤에서 괴상한 소리를 내며 몰려오는 것들이 느껴진다. 바로 놓인 포터는 제대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화물칸에 올라타 유리창을 두드렸다. 나는 탔으니 출발하라는 신호를 알아들은 셔누형이 바로 핸들을 꺾으며 속도를 냈다. 말하지 않아도 대충 어떤 의미인지 서로 알아차리는 게 이 와중에 뿌듯했다.

 몇몇 좀비들이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우리를 따라온다. 미친 거 아니냐고... 우어어어. 나방이 나올 것 같이 이상한 입 모양으로 소리를 낸다. 따라올 거면 조용히 따라오란 말이야!! 소리 내지 말고!!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행동도 못하게 골프채를 길게 휘둘렀다. 몇은 빠르게 휘두른 속도에 날아갔고 서너마리 좀비들이 트럭에 매달려 질질 끌려온다. 지겹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게 생명인가? 아니 죽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되는 거야, 좀비는? 진짜 좀비 안 되고 싶어....

 좀비가 붙은 걸 봤는지 형이 좌우로 핸들을 움직여서 중심을 잃고 휘청였지만 끝까지 골프채로 놈들의 손등을 쳐냈다. 움푹 파여 흰 뼈가 보일 정도로 덜렁거리는데도 질기다, 질겨. 징그럽게 느껴질 여유 따윈 없었다. 마지막 한 놈을 쳐냈다고 생각하는데 어디서 또 다른 하나가 매달린 좀비 위로 튀어올랐다. ...윽! 반쯤 사라진 좀비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반사적으로 팔로 막았다. 팔을 꽉 깨물고 늘어져서 발로 면상을 뭉개버렸다. 반밖에 없던 얼굴이라 순식간에 쪼개져 버렸지만 팔에 송곳니 하나가 박혀 있었다. 쯧. 입소리를 내며 박혀있던 걸 뽑아내고 마지막으로 매달려있던 좀비를 떼어냈다. 다행히 우리가 가는 길은 막힘이 없었다. 시끄러운 소란스러움이 없어진 걸 느낀 셔누형이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형원아, 괜찮아?!!!"
"아... 네... 괜찮아여.. 근데 형... 어떡하지..."
"왜... 왜??? 어디 다쳤어?"
"나 요기 팔 물렸어여..."

 낑낑거리며 물린 자국을 보여주니 형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다. 형... 원래 피부가 하얬던가? 물린 곳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또 어디 물린 곳은 없는지 물어보기 시작한다. 딴 데는 다 괜찮구... 요기 팔만... 아프면 항상 셔누형한테 응석을 부리고 싶어져. 근데 내가 지켜주겠다고 해놓고는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게 너무 쪽팔린다. 셔누형 애인하기에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멋있게 지켜주고 싶었는데.

"형... 나 좀비 되면 어떡해여?"
"형원아..."
"지금은 사람이니까... 좀만 있다가 나 이상해지면 도망가여. 알겠져?"
"채형원..."
"조금만 같이 있다가, 가요. 좀비 애인... 은 좀 별루야. 내가 하기 싫어."

 약속. 새끼손가락 걸어요. 좀비가 되면 꼭 떠나기로. 약속했으니까 꼭 지켜요. 지켜보는 사람 없다고 약속 안 지키지 말고. 액션배우처럼 멋지게 화물칸에 올라와 내 옆에 앉은 셔누형은 아무 말이 없었다. 셔누형, 빨리 대답해요. 나 좀비가 되면 형 혼자 가야 된다구요. 형이 혼자 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데도 왠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로 와닿지가 않아서.

야, 형원아. 우리 계속 운이 좋았잖아?
지금까지 아무도 안 다쳤고, 구하는 차들도 다 괜찮았고, 집도 있었고, 밥도 먹었고...
그러니까 이번에도 운이 좋을 거야.
좀비 드라마나 영화 보면 물려도 멀쩡한 사람 꼭 있잖아.
그거 난 너라고 생각해.
우리 계속 운이 좋았으니까, 지금도 괜찮을 거야.

 차분히 말하는 셔누형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안심이 된다. 형이 해주는 말은 다 안심이 된다. 우리는 운이 좋다는 말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결혼식도 해야하구... 형원이, 너 신고도 할 거야. 혼인신고. 푸하하하. 맨날 우리 팬들한테 들었을 땐 마냥 재밌었는데, 셔누형이 말하니까 너무... 너무 맘이 간지럽다. 셔누형땜에 미치겠다, 진짜. 옆에 앉은 형의 손을 꽉 잡았다. 셔누형이 깍지 손을 낀다. 언제는 징그럽다며 싫다더니. 이런 위기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위기 속에서 사랑을 더 타오른다더니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여기서 더 타오르면 안 되는데. 어둑어둑했던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기 시작한다. 한여름의 해는 다른 계절보다 빨리 밝아져서 좋다. 햇살이 차분히 내려앉는다. 오늘이 새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