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세상을 구하는 동안 우리는

이디

01


 습하고 더운 날씨에 아침부터 숨이 턱턱 막힌다.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의 온도가 상승한다더니 요즘 기온을 보면 부쩍 실감이 난다. 작년보다 더 더워진 날씨에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일도 점점 힘들어진다.

'행정실'

 현우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에어컨을 켜고 자리에 앉았다. 책상에 집게처럼 꽂아서 쓰는 탁상용 미니 선풍기가 영 시원찮게 돌아가는 통에 살짝 짜증이 났지만, 곧 에어컨이 돌아갈 테니 잠시 참기로 했다. 그러나 에어컨도 크게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워낙 오래된 에어컨이라 켜고 나면 몇 분간은 덜덜거리는 소리가 나지만, 기특하게도 시간을 좀 주면 작동은 한다.
 탕비실로 향한 현우는 언제부터 이 사무실에 존재했는지 모를 오래된 드립커피 머신에 물과 원두가루를 채우고 버튼을 눌러 커피를 내렸다. 포트에 커피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고 깔끔하게 머리를 넘겨 드러난 이마에서도 송글송글 맺힌 땀이 방울져 떨어졌다. 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유리잔 두 개를 채웠다. 투명한 유리잔에 얼음이 부딪쳐 담기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채 대리는 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려는지 벽에 걸린 시계는 어느덧 8시 55분을 향하고 있었다.

 똑똑 떨어지는 커피 방울이 유리 포트 안에서 연못을 이룰 때쯤, 멀리서 채 대리의 달뜬 숨소리가 들려왔다. 입구에 도착해 출근 카드를 찍은 채 대리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좀비처럼 자기 자리를 찾아가 털썩 앉았다.

"으어어 .."

 현우는 양손에 유리잔을 하나씩 들고 탕비실을 나섰다. 커피를 건네자, 월요일 아침 새 같은 얼굴을 한 형원은 유리잔을 받아 들고 끄덕 목례를 했다. 빨대에 입을 대고 볼이 홀쭉해지도록 쪼옵 빨았다.
 형원의 책상에 반쯤 걸터앉아 냉커피를 시원하게 세 모금 쯤 들이켠 현우가 웃음 서린 얼굴로 형원을 바라봤다.

"오늘도 아슬아슬했네?"
"으어... 죽어라뛰었죠 뭐."
"맘먹고 좀 일찍 일어나봐."
"그게 맘대로 안 돼요 저는.."
"그럼 계속 지각하는 거 아닌가?"
"저 또 지각하면 인사평가 어떡해요. 이젠 진짜 잘릴지도 몰라요."
"아예 퇴근하자마자 잠드는 건 어때?"
"그러면.. 그냥 많이 잔 사람이 되죠 저는.."
"역시.. 채 대리가 잠으로는 1등이지."

 현우는 형원의 말에 기계적으로 맞장구를 치면서도 늘 해고 따위는 없을 일처럼 굴었다. 형원은 그런 현우가 살짝 얄미웠다. 물론 진짜로 남의 일이니 당연하겠지만. 그렇대도 어떻게 지각 한 번을 안 할 수 있지? 형원은 일하는 동안 단 한번도 현우가 자기보다 늦게 온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 아니야. 로봇이야, 로봇.

"과장님 저 모닝콜 해주시면 안 돼요?"
"모닝콜로 되겠어? 차라리 카풀을 하면 어때?"
"과장님 차 있었어요?"
"나는 없지. 그냥 아버지가 타시던 차 물려받기로 했어."
"오~ 차종이 뭔데요?"
"그.. 쫌.. 생긴게.. 보면 알 텐데, 그 왜 있잖아, 가-,"

 시곗바늘이 9시를 가리키자 어김없이 전화가 울린다.

“하아…”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미처 말을 다 마치지 못한 현우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가 하루를 거르는 법이 없네요.”
“이젠 뭐, 안 오면 이상할 정도지. 내가 받을게.”

 현우는 자리로 돌아가 빨간 불이 점멸하며 요란하게 울려대는 전화기를 보고 목을 한 번 가다듬은 후 수화기를 들었다.

“네, 센티넬-가이드 연합 센터 본부 행정실입니.. 네 선생님. 압니다. 사단법인 센티넬 인권위원회시죠.”

 매주 월요일에 오는 저 전화를 시작으로 센터 행정사무실의 업무는 시작된다.

“늘 말씀드리지만 센터 홈페이지에 문의 글을 올리시는 게 낫습니다. 저희 부서에 매일 전화를 하셔도 그렇게 빨리 처리 되지가 않습니다. 예, 압니다. 상부에 보고는 하고 있지만 저희도 절차라는 게 있고…”

 형원은 전화를 받는 현우를 바라보다 이제는 둘 뿐이라 휑한 사무실을 둘러봤다.
 원래 사무실에는 많은 동료가 있었다. 입사 동기인 이민혁 대리와 유기현 대리도, 후임으로 들어온 이주헌 주임과 임창균 사원도 센티넬이나 가이드로 발현이 되어 모두 이 사무실을 떠났다. 행정실장은 내부 정보를 이용해 불법도박장에서 열리는 무단이탈센티넬 스포츠토토에 가담했다가 적발되어 구치소에 들어갔다.
 실장도 없이 둘만 남은 사무실에서 업무에 치이는 삶이 벌써 몇 달째인지. 물론 행정 업무가 중요도 면에서는 타 부서에 비해 떨어지긴 하지만 워낙 다양한 업무를 진행하다 보니 늘 정신이 없다. 인사팀에 인력 충원을 해 달라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도무지 사람을 뽑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매사 침착하게 업무처리를 해내는 손 과장님마저 없었다면 진작 그만두었을 것이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무실이 있는 관리동까지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세련된 디자인의 센터 건물을 볼 때마다 속았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 사무실에는 인력도 비품도 지원을 안 해주는 탓에, 그 귀찮은 일들을 달랑 둘이 하면서 오래돼서 누래진 골드스타 에어컨 쓰는데. 저 망할 고물 에어컨은 고장도 안 난다. 센터 본부가 복지 제일 좋다는 말도 이제는 다 옛말이다.

"오늘 시설 점검 있는 날이지?"
"네."
"체크 잘 해주고, 난 오늘 검사 마치는 발현자 있어서 연구소 들러서 인도하고 올게."
"넵. 이따 오후에 봬요."

 주기적으로 실시되는 시설점검이 오늘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센터 부지가 워낙 넓기 때문에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 특별한 힘을 가진 이들이 소속된 곳인 만큼, 건물을 부숴 먹는 일은 부지기수다. 겉으로 드러나는 폭발은 눈에 띄니 오히려 나은 편이고,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센티넬들이 자기도 모르게 힘을 발산하여 생긴 건물 내의 균열들이다. 예고없이 건물이 무너지면 인명피해가 상당하기때문에 수시로 체크하고 설비팀에 전달해야 한다. 물론 충격을 흡수하고 변형이 적은 고강도 특수 소재로 지어 비교적 안전하긴 하지만, 건물 특성상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는 않기 때문에 늘 염려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최근에 발현해 입대한 부대원들은 숙소가 신식이라고 좋아하지만, 그게 사실은.. 당신이 들어오기 전에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으니 형원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인 시설점검이라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 형원은 책상 위 구석에 있는 서류 서랍을 열어 센터시설점검표 용지를 꺼내 클립보드에 끼웠다. 남들은 다 태블릿으로 업무를 보지만 형원은 종이가 편했다. 연구동이랑 훈련소 다 돌고, 설비동까지 돌려면.. 시간이 꽤 걸리니 얼른 출발해야 한다. 형원은 현우가 내려준 커피를 쪼롭 쪼롭 급히 마셔 넘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어.. 안녕하세요. 여기가 행정실 맞죠?"

 사무실 문을 잠그다 말고 들려오는 말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센티넬-가이드 페어가 손을 잡고 나란히 서있었다. 형원은 바로 출발을 못 하겠다는 생각에 울상이 됐지만 직장인답게 그런 마음은 속으로만 갖고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민원인을 맞이했다.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저희.. 어제 각인했는데.. 각인 신고서 제출해야 한다고 해서요."
"아 각인 신고하러 오셨구나. 서류 작성해야 하니까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함께 서서 서류를 쓰고 있는 페어를 보며 형원은 지금껏 보아온 페어들을 떠올렸다.
센티넬-가이드의 각인은 일반인의 혼인신고와는 꽤 다른 개념이다. 혼인신고로 법적 관계가 형성되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센티넬-가이드는 센티넬의 폭주를 막고 회복과 안정을 시키는 가이딩의 최고 단계인 접촉 가이딩을 했을 때 맺어진다. 각인의 당사자들은 각인된 사실을 알지만 센터는 연구소에서 에너지를 감지하지 않는 이상 각인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각인 후 각인 신고 서류 제출을 필수로 하게끔 규정이 바뀌었다. 전년 대비 금년 각인 페어 수나 페어 매칭률에 따른 각인 비율 등의 통계를 내기 어려워서였다. 새로운 규정이 생겼어도 각인 신고를 안하는 페어가 태반이었지만, 연합에 각인 신고된 페어에게 주어지는 세금 감면 복지혜택이 생겨나자 너도나도 각인 신고서를 내겠다고 행정실을 찾아와 업무가 마비된 적도 있다고 한다. 요즘은 공인인증서만 있으면 센가24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신고가 가능한데도 가끔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페어들이 있다. 업무가 조금 늘긴 하지만, 낭만 있고 좋지 뭐. 그러나 여유로운 생각과는 달리 할 일이 잔뜩 쌓인 형원의 한 쪽 다리는 책상 아래서 달달 떨리고 있었다.





02



 현우는 연구소에 도착해 검사실 앞에 앉아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오늘 인도할 발현자는 한 명. 출력해 온 센티넬-가이드 발현 후 주의 사항이나 센터 시설 이용 관련 안내 서류를 들춰보며 빠뜨린 게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발현자 인도는 꽤 시간이 오래 걸려서 이것 때문에 다른 업무가 밀리기 십상이다. 예정된 검사에 검사가 추가에 또 추가. 스케쥴표에 적힌 검사 종료 시각은 믿을 게 못 된다. 이제는 형원도 제법 연차가 찼으니 발현자 인도 업무를 시켜도 되겠지 싶다가도,

쾅-!

"뭐 하는 거야, 이 멍청한 것들아! 당장 잡아 와!"

 검사실 문을 부수고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한 채 맨발로 도망치는 발현자와 그를 잡기 위해 족히 30명쯤 되는 보안요원들이 무장하고 뛰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현우는 작게 숨을 뱉었다. 발현자의 심신은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데다 그들을 사람 취급 않는 보안요원들은 너무 거칠다. 힘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실랑이를 벌이다 폭주해 버려서 끝내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일이 다반사니, 마음 약한 형원이 견딜 수 있을 리 없다. 몇 차례 쫓고 쫓기는 소동 끝에 붙잡혀 검사를 마친 발현자가 센터 유니폼을 걸치고 넋 빠진 얼굴로 검사실에서 나왔다. 살면서 상상하지 못할 일들을 겪었으니, 멘탈이 멀쩡할 리 없다. 현우의 업무는 이러한 상태의 발현자를 무사히 센터 내의 숙소로 데려다주는 일이다. 보안요원이 거칠게 그를 붙잡아 골프카트 뒷좌석에 태웠다. 현우는 보안요원이 내미는 서류에 서명한 후, 운전석에 올라타 천천히 주행을 시작했다.

-

 배정된 숙소에 도착해 발현자를 소파에 앉히고 옆 의자에 앉은 현우는 테이블 위로 명함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센터에서 행정업무 담당하는 손현우 과장입니다. 앞으로 여기 센터 소속 기숙사에서 지내시게 될 거고요, 이건.. 센터 시설 이용 안내랑 센티넬 훈련 과정 안내 서류입니다. 안정이 되면 천천히 읽어보시고 궁금한 사항 있으시면 이 쪽으로 연락 주세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멍한 얼굴로 명함을 받아 든 센티넬은 명함을 볼 생각도 않고 다시 공상에 빠졌다. 현우는 테이블 위에 준비해 온 서류를 올려놓고 최대한 간단하고 쉽게 설명을 시작했다. 제 앞에 앉아있는 센티넬이 지금 하는 말들을 기억하지 못 할 거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이건 현우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첫 전투를 수행하기 전까지는 연구소와 훈련소를 오가며 능력의 가용범위와 위력을 확인하고, 그에 맞게 전투 대비 훈련을 하게 되실 겁니다."
"..."
"이제는 일반인이 아닌 센터 소속의 군인 신분이기 때문에 상부의 허가 없이는 자유롭게 외출이나 외박을 하실 수 없고..."
"나갈 수가 없다고요?"

 현우의 말에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한참을 멍하니 듣던 센티넬이 갑자기 되물었다.

"돈은요?"
"네?"
"돈은 주나요? 집에 돈 버는 사람이 저뿐이에요. 저, 제가 없으면 가족들 못 살아요. 엄마는 폐쇄병동에 있고 할머니랑 동생, 이제 저 없이 어떻게-, 아.. 죄송해요."

 넋이 나가서 숨도 안 쉬고 말을 이어가던 센티넬은 이내 전원 꺼진 로봇처럼 가라앉더니 현우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현우는 테이블 위에 있던 발현자 정보 차트를 집어 들었다. 이름 윤지안.. 나이가.. 열일곱 살. 키가 작아서 훨씬 어린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나이에 비해 성숙한 눈빛과 유난히 수척한 팔다리가 눈에 띄었다. 이 아이가 살아온 삶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현우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고 뒷부분에 할 설명할 내용을 앞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 전투에 투입되면 특수근무수당이랑 위험수당이 지급됩니다. 본격적으로 훈련이 시작되면 훈련수당도 나올 테니 가족들 생활비로 충당이 가능할 겁니다. 원하시면 최대한 빨리 훈련에 투입시켜달라고 상부에 요청해 두겠습니다."
"..."
"그리고.. 가족들께 연락을 취해서 센티넬-가이드 부양가족 보듬 사업이랑 지원금 신청할 수 있게 서류 준비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마시고, 몸부터 누이고 쉬세요. 지금 얼굴빛이 너무 안 좋아요."
"..."
"침실에 가보시면 훈련병 키트가 있을 겁니다. 그 안에 생필품부터 능력에 맞는 약품이나 영양제가 있으니까 정 입맛이 없으면 그 안에 있는 포도당 캔디라도 꼭 챙겨 드시고요. "

 현우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 펜.. 있어요?"

 펜..? 현우는 뜻밖의 요청에 멈칫하다가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 펜을 꺼내 내밀었다.
 펜을 받아든 소녀는 현우가 테이블에 올려둔 안내문의 구석에 펜으로 뭔가를 적은 후 찢어서 현우에게 건넸다. 쪽지 안에는 가족들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그리고.. 병원 이름이 적혀있었다.

"혹시나해서요."

 현우는 쪽지를 파일홀더 안에 넣었다.

"...아,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기, 감사합니다."

 현우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소녀에게 목례를 하고서 무거운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업무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한 현우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지쳐 보였다. 오랜만에 맛있는 거나 먹자고 할까. 행정실에는 이제 두명 밖에 남지 않았지만, 실수인 건지 그 많은 일 둘이 다 하느라 애쓴다는 뜻의 위로 차원인건지, 예산에 산정된 팀 회식비 금액은 삭감되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덜 바쁜 시기에는 둘이서 날마다 회식이랍시고 열심히 먹어대서 피둥피둥 살이 올랐었다. 최근엔 일이 바빠 회식은커녕 야근이 더 잦긴 했지만. 요즘 현우는 확실히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형원도 마찬가지였지만 실제로 하는 업무를 나열해 보면 현우가 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 자리에 앉아 의자 목 받침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현우를 보며 형원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서로 뿐이어서 그런지 더 애틋한 동료애가 생겼다.

“과장님, 오늘 퇴근하고 소주 한잔하시죠.”
“그럴까? 나 꼼장어 좀 땡기긴 했어. 아 채 대리 꼼장어 안 먹나?”
“저 장어는 먹어봤는데. 꼼장어..는 안 먹어보긴 했어요.”
“아 그래? 그럼 다른 거 먹자. 좋아하는 거. 새우 먹으러 갈래?”

 형원은 편식이 심한 자신을 배려하는 현우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예전에 회식을 할 때도 실장은 꼭 형원이 못 먹는 메뉴만 불러댔지만 늘 현우가 중간에서 도와주어 어렵지 않은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현우는 알수록 진국이었다. 겨우 하나 남은 부서원이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다.





03



 다음 날, 출근한 두 사람은 전투적인 아침을 보냈다. 오늘따라 행정실이 왜 이리 붐비는지. 각자 민원인들이 요청하는 자잘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아, 저 발현해서 학교 자퇴했는데 며칠 전에 능력이 소멸됐거든요. 그래서 학교에 연락하니까 그동안 센터에서 훈련받은 이력 있으면 자퇴 취소해준다고 해서요."
"아 그럼 센티넬-가이드 훈련수료증 발급해 드릴게요. 500원입니다."

"제 배우자가 퇴사를 하게돼서 가족들이 건강보험 지역 가입자가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보험료가 많이 나오는 거 아닌가요? 이거 방법 없을까요?"
"이런 경우에는 가족들을 선생님의 부양가족으로 등록하면 됩니다. 배우자분 건강보험 득실 확인서랑 혼인관계증명서를 떼서 제출하시면 그렇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그간 제가 투입됐던 전투 목록 같은 거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배우자가 수술을 해야하는데 제가 센티넬이라는 증명서가 있으면 병원비 할인이 된다고 해서 말입니다."
"어 그러면.. 센티넬-가이드 사실 증명이랑 전투경력증명서가 필요하시겠네요. 총 2부 하셔서 1500원입니다."

 두 사람은 평소에 비해 붐비는 행정실에 갇혀 오전 나절을 다 보냈다. 오늘은 평소에 비해 유독 민원인이 많아 좀처럼 쓸 일 없는 번호표 발행기까지 꺼내다 사용했다. 형원은 반쯤 넋 나간 얼굴로 아침에는 아이스커피였던 묽고 미지근한 액체를 힘없이 쪽쪽 빨아 마셨다. 가뜩이나 할 일이 많은데 이러면 또 퇴근 시간 지나서까지 근무해야 하잖아. 광고를 하든 어쩌든 간에 온라인 서류발급을 더 장려해야 한다니까.

"흐아아.. 오늘따라 정신이 없네요."
"그러게.. 오늘 무슨 날인가? 엄청 바빴다. 참, 오늘 시위 있는 거 알지?"
"네. 알죠. 오늘 화요일이잖아요."

 센티넬인권보호협회는 매월 둘째 주 화요일에 시위를 한다. 관할 경찰서에 집회신고서를 제출하고 합법적으로 진행하는 시위라 막을 길이 없다. 하지만 '센티넬'이라는 이름을 걸고 하는 시위인 만큼 일이 커져서 좋을 게 없기 때문에 보안요원들이 동석하여 시위가 격해지지 않게 통제한다. 하지만, 워낙 거칠게 구는 이들이라 시위 때 폭행 건으로 경호팀장이 두어 번 고소당한 이후로는 상부에서는 시위 현장의 마찰이 커지지 않게끔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때문에 꼼짝없이 오늘 오후는 외근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따르르르르릉

 이제 겨우 쉬나 했더니 또 걸려 오는 전화에 형원은 얼굴을 감싸 쥐고 흐아앙 소리를 쳤다. 가벼운 한숨을 쉬고, 목을 가다듬고서 수화기를 들었다.

“네, 센티넬-가이드 연합 센터 본부 행정실입니다. 아 네, 서장님 안녕하세요. 네 알죠. 손 과장님이랑 시위 현장으로 곧 출발 하려고요. 네? 그게 오늘이에요? 아... 네 알겠습니다. 네. 이따 뵙겠습니다. 넵~!."

 형원은 전화를 끊자마자 다급하게 현우에게 상황을 알렸다.

"과장님, 오늘 시위요. 센인보 말고 또 있다는데요?"
"또? 어디서 하는데?"
"가이드 피해자연대요. 서장님도 지금 알았다고, 미리 전달 못 해서 미안하다고 연락왔어요."

 젠장, 일이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현우는 지끈 아파오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두어 번 문질러 누르고선 일어섰다. 입구 쪽으로 가서 걸어둔 재킷 주머니를 뒤져 차키를 꺼내 들었다. 아마도 보안팀에서는 이 얘기를 들으면 인원을 배로 늘려서 보낼 것이다. 무장한 보안요원들이 잔뜩 몰려가 있으면 위화감 조성에 큰 몫을 할 텐데. 여름이 되니 한강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민들이 부쩍 늘었다. 이렇게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소동이 일어나면 부정적인 여론에 힘이 실릴 테니 결코 좋을 게 없다. 현우는 마음이 급해졌다.

"채 대리, 나 먼저 내려가서 차 빼놓고 있을게. 보안팀에 연락해서 상황 공유 해주고 천천히 내려와."





04



 형원은 건물 입구로 내려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두리번거렸다. 늘 타던 회사 차가 안 보이는 걸 보니 과장님은 아직 안 온 것 같았다. 그때, 건물 앞으로 형원의 눈을 사로잡는 엄청난 차가 등장했다.

'와, 각그랜저. 실물로 본 적은 없었는데. 진짜 대박이다.'

 형원은 호기심많은 초등학생처럼 기웃거리며 차의 여기저기를 관찰했다.

"와..이거.. 진짜 각졌다.. 대박..."

 신나게 구경하며 뒷 범퍼 쪽으로 간 형원은 쪼그려 앉아 각진 쉐입 쪽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아야야! 손 베이겠네 베이겠어~ 와.. 진짜 뾰족해..."

 그때 조수석 창문이 열리더니 차 안에서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 대리! 뭐해, 타 얼른!"
"아니, 으에, 과장님?"

 형원의 커다란 눈이 더 커졌다. 현우는 오늘 저 눈이 기어코 바닥에 쏟아지지 싶었다. 조수석에 탑승해 벨트를 맨 형원의 눈은 여전히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호기심 어린 큰 눈을 휙휙 돌리며 차 안의 여기저기를 구경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아니 물려받았다는 차가 각그랜저였어요?"
"엉. 좀 오래된 차긴 하지?"
"와,, 아니, 난 너무 신기한데? 저 이거 실제로는 첨 봐요."

 좌석에는 대나무 시트가 씌워져있고 콘솔박스에는 홍삼 캔디 서너 개가 있었는데, 어쩐지 이게 현우와 너무 잘 어울리는 바람에 형원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왜 웃어?"

 현우는 옆에서 빵 터진 형원을 힐긋 보곤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영문 모를 웃음에 현우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05



 시위 현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하필 가장 더울 오후 3시라니. 형원은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큰 눈을 최대한 작게 뜨고 손을 이마께에 가져다 댔지만 크게 소용이 있지는 않았다. 군기가 바짝 든 순경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연합본부에서 나왔습니다."

 잔뜩 경계하는 미어캣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순경들은 두 사람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고는 꾸벅 인사하고 길을 터줬다. 목례를 하고 안쪽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시위 장소 앞에 서 있는 경찰차를 향해 걸어가며 현장을 둘러봤다. 넓은 한강공원에 두 단체가 나누어 서서 시위가 한창이었다. 역시 현우가 우려한 대로 평소보다 두 배의 인원이 출동했다. 시위하는 인원보다 보안요원의 수가 더 많아 보일 지경이었다. 현우는 선글라스를 쓰고 경찰차 앞에 서 있는 서장을 발견하고 먼저 인사를 했다. 서글서글한 성격의 평범한 50대 아저씨인 서장은 선글라스만 쓰면 왜인지 경찰 포스를 풀풀 풍겼다.

"서장님, 안녕하십니까."
"아, 손 과장님. 오셨습니까. 날 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우, 저희야 뭐. 서장님이 더 고생하시죠. 상황은 좀 어떤가요?"
"그게 참, 저희 경위가 실수를 했습니다. 집회신고서를 진즉에 받아놓고는 글쎄 상부에 보고를 안 해서 이 사달이 났지 뭡니까.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너무 괘념치 마시고, 현장 통제만 잘 부탁드립니다. 큰 사고나 소동만 없으면 그걸로 괜찮으니까요."

 현우가 서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형원은 시위 현장을 살폈다.

'센티넬도 사람이다! 인권 착취 중단하라!'

 오른쪽에 선 센티넬인권보호협회는 큰 현수막을 펼쳐 양 끝에 선 사람들이 막대를 잡고 고정하고 있었다. 센티넬인권보호협회가 바로 아침마다 사무실로 연락을 해대는 단체다.

'가이드 인권 보호', '가이딩을 거부할 권리', '가이드는 수단이 아니다.'

 왼쪽에 선 가이드피해자연대는 각자 판넬 하나씩을 손에 들고 있었다. 가이드의 수가 워낙 적어 시위를 나온 사람의 수도 적었다. 언뜻 보니 가이드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섞여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주장을 위해 시위하는 두 무리 사이에, 애매하게 서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양쪽 진영 어디에도 끼지 않고 허망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성은, 손에 판넬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처럼 열의 있게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그저 손목에 감긴 손수건을 붙잡고 어딘지 모를 허공을 응시했다. 뭘 보는가 싶어 시선을 따라가 봤지만 보이는 건 오후 녘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에 반사되어 수면에 일렁이는 빛무리뿐이었다. 보고있자니 눈이 시려, 형원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의 텅 빈 시선은 여전했다. 형원은 고개를 갸웃하고선 서장과 얘기를 나누는 현우에게로 돌아갔다.





06



 해가 멀어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 때쯤, 신고된 집회 시간이 종료되었다. 시위 중간에 두 단체가 부딪칠 뻔한 일이 있었지만, 보안요원들의 눈초리에 금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날이 더워 그런지 다들 예민했다. 우려와 달리 큰 문제 없이 시위가 끝나서 다행이었다.

"무사히 끝났네."
"그러게요. 다행이에요."
"복귀하지 말고 여기서 바로 퇴근하자."
"네."
"아, 채 대리."
"네?"
"맥주 한잔할래?"


-


"과장님."

 형원은 강가 앞 계단에 앉아 있던 현우에게 차가운 캔맥주를 건넸다.

"어, 땡큐."

 현우가 힘을 주어 캔을 따는 소리가 제법 청량하게 들렸다. 현우의 옆에 나란히 앉은 형원은 손에 닿는 맥주캔의 차가움이 좋아서 양손으로 꼭 쥐고 있다가 저도 따라서 캔을 뜯었다. 야경이 비쳐 물 위에 켜진 전구들은 바람을 따라 둥실둥실 유영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흐르는 강을 응시하며 잔물결의 여파를 감상했다.

"여름밤, 좋지 않아?"
"그런가요?"

 그냥 다른 계절이랑 똑같은 밤 같은데. 형원은 속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아직 안 갔네요."
"누가?"
"쩌어기요."

 형원은 턱짓으로 사람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현우는 형원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위를 했던 공터에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 아까 그 사람도... 아직 있네.

"저들은 뭘 위해서 저러는 걸까요?"
"글쎄..."

 현우는 말끝을 흐리며 맥주를 마셨다. 더는 대답이 없을거라 생각했던 형원의 귀에 들려온 말은 뜻밖이었다.

"사랑 아닐까?"

 현우는 강을 바라보며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사랑이요?"
"저기 모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 그게 사랑이 아닐까 해서."

 형원은 예상 못 한 대답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채대리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사랑... 사실 전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 것 같아요."

 형원은 쭈뼛대다가 현우를 향해 물었다.

"과장님은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잠시간의 정적 후, 현우는 크게 숨을 한번 쉬고 형원의 질문에 답을 했다.

"사랑을 하면, 서로의 세상이 하나가 되는 것 같아."
"세상이요?"
"... 사랑을 잃어도 내 세상은 남아있을 것 같지만 전부 무너져서 돌아갈 곳이 없어지거든. 폐허가 된 삶에서 남은 사랑의 흔적을 찾아 헤매고, 온 몸에 새겨진 기억을 빼낼 재간이 없어서... 아파도 그저 품고 살아가는 거야. 물론 모두가 이런 마음도 아닐 테고, 나 역시 저 마음들을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낀 사랑은... 그렇더라고."

 현우는 쓰게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형원은 현우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를 듣고 나니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왜일까. 사랑을 말하는 현우는 지금까지 알아 온 현우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현우는 고개를 젖혀 남은 맥주를 다 털어 넣고 일어나, 힘주어 빈 캔을 구겼다. 현우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작게 숨을 한번 내쉬고는 아직 앉아 있는 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집에 가자, 이제."
"..."
"내일 출근해야지."

 바람에 날리는 짧은 머리칼, 수면 위 반짝이는 야경처럼 빛나는 눈, 단추를 풀어 헤치고 팔을 걷어 올린 하얀 셔츠. 선선히 부는 바람에 현우가 입은 흰 셔츠의 허리께가 살랑 살랑 나부꼈다. 형원은 현우를 올려다보며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휩싸였다. 지금 이 순간은 살면서 봐온 그 어떤 풍경보다도 아름다웠고, 형원은 그날 밤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07



 새벽 6시, 형원은 따가운 눈을 감싸 쥐고 맥아리 없는 비명을 흩뿌리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밤새 뒤척이다가 결국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어제의 장면이 떠올랐다. 어제는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현우가 말했던 사랑은 어떤 걸까. 실제로 그런 사랑이 존재할까. 그는 그런 사랑을 해 본 걸까. 그렇다면 누구랑? 어지러운 마음과 정돈되지 않은 감정은 형원을 혼돈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형원은 어렵게 침대에서 빠져나와 느적느적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칫솔에 치약을 짜서 입에 넣었다. 커다란 눈을 반만 뜨고 힘없이 팔을 흔들던 형원은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마주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에 퉁퉁 부은 얼굴. 큼직한 흰 티와 반바지가 엉망으로 구겨진 채 간신히 몸에 걸쳐져 있었다. 이를 벅벅 닦아 입안이 가득해질 무렵 형원은 세면대에 거품을 퉤 뱉었다.

"동경.. 같은 건가?"

 입가에 흰 거품을 묻히고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 형원은 입을 헹구고 화장실을 나섰다. 복잡한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꺼냈다. 형원은 힘없이 주절거리며

"그래. 매일 붙어있으니까."

 차가운 물병을 집어 뚜껑을 연 후,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래서."

 단박에 들이켰다. 꿀꺽꿀꺽 넘기다 보니 목구멍이 뜨거웠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마시는 것을 멈춘 형원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손에 든 병을 봤다. 이건.. 생수가 아니고...

'새로'
"하... 진짜.. 미치겠네..."




-




"어디 아파?"
"네?!"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아 저 아침에 냉장고 열고 물... 마셨는데, 물, 물인 줄 알았는데, 물이 아니고...그게.. "
"...?"
"소..소주를... 하아.. 모르겠어요.. 저 일할래요..."

 형원은 의자를 책상으로 바짝 끌어와 자세를 고치고 컴퓨터를 켰다. 현우는 알 수 없는 형원의 행동에 미간에 골짜기를 만들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채 대리 오늘 진짜 이상하다."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늘어놓았던 서류들을 정리하더니 나갈 채비를 했다.

"어디 가세요?"
"나 연구소 좀 다녀올게."
"엉? 오늘 발현자 있어요?"
"아니. 오늘은 없는데, 시설 개선 때문에 회의한다고 좀 와달래. 그리고 가는 김에 결재받을 것도 있고 해서."
"아.. 네. 다녀오세요."

 현우가 사무실을 떠나고 난 후, 형원은 과학실험을 하는 초등학생처럼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나열했다. 시설개선이면 어떤 시설이지? 얼마 전에 점검할 때 보니까 설비동 에어컨이 시원찮던데. 그것 때문인가? 아니면 문서보관창고 증설? 이제 꽉 차서 서류 더 넣을 자리도 없겠던데. 근데 웬 결재? 우리 시스템 전자결재로 바뀐 지가 언젠데. 평소 같으면 궁금해서 꼬치꼬치 캐물었을 것들인데, 형원은 어젯밤 이후로 현우를 보기가 껄끄러웠다. 현우가 떠난 후 형원은 일을 하다가도 자꾸만 딴생각에 잠겼다. 형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을 마저 해보려 시도했지만, 서류 한 장 쓰다가 딴 생각을 하고, 메일 회신을 하다가 또 다른 생각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래선지 오늘따라 영 업무에 속도가 나질 않았다.

 그때, 행정실 문이 열리고 센티넬 유니폼을 걸쳐 입은 여자아이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저기요."
"어떻게 오셨어요?"
"걸어서요."
"네?"
"...손...현우 과장님? 있어요?"
"어...지금 잠깐 자리 비우셔서요. 어떤 일 때문에 찾으시는지, 아 잠시만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창밖에 결재판을 손에 들고 걸어오는 현우가 보였다.

"금방 오실 거니까 조금만 앉아서 기다릴래요?"

 형원은 민원인을 빈자리에 앉히고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이는 무릎 위에 상자를 하나 올려두고 얌전히 기다렸는데, 상자는 고운 보자기에 싸여있었다.
 현우가 결재판으로 부채질을 하며 사무실에 들어서자, 아이가 벌떡일어나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윤지안 훈련병?"
"네. 어제요. 우리 할머니가.. 고마웠다고요. 이거 전해달라고..."
"아..."

 어제? 어제면 나랑 하루 종일 붙어서 일하지 않았나? 형원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봤다.




-




 민원인이 가고 나서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형원은 발로 의자를 움직여 현우의 자리 쪽으로 가 은근히 질문을 던졌다.

"어제 인도한 훈련병? 저 친구 집에를 다녀왔어요? 언제요?"
"아, 응. 어제 퇴근하고 잠깐. 늦은 시간이라 걱정했는데 반겨주셔서.. 내가 더 감사했지 뭐."
"가서요?"
"인도하고 나서 할머님께 전화 드렸는데 많이 놀라신 모양이더라고. 저 친구도 두고 온 가족들 너무 걱정하고해서.. 잠깐 가서 설명해 드리고, 궁금하신 것들 좀 알려드리고. 그랬어."
"와..."

 형원은 사려 깊은 현우의 면모를 또 한 번 발견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은 진짜 뭐지? 이런 사람이 내 동료라니. 평생을 살면서... 이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멍하니 입을 벌리고 생각에 빠져있던 형원을 보던 현우는 뭔가 생각났는지 형원을 불렀다.

"아참, 채 대리."
"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형원의 자리로 온 현우는 갑자기 형원의 이마에 불쑥 손을 올렸다.

"열은 없는데."

 형원은 얼굴이 화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귓가에 자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왔다.

"내 기억에 채 대리는 술 마셔도 빨개지지가 않았던 것 같은데, 종일 얼굴이 빨개서."

 설상가상으로 현우는 나머지 손으로 형원의 뒷 목을 감싸쥐었다.

"이마는 괜찮은데 목이 좀.. 뜨끈하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 아프면 꼭 병원 가고."

 제 볼일만 보고 자리로 돌아간 현우를 응시하던 형원은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췄다.

 어쩌지.
 겨우 하나 남은 부서원이 좋은 사람이라 큰일이다.





08



 형원은 벌써 3일째 현우를 피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서 대화하는 건 견딜만했지만, 손이나 몸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너무 뛰어대고 얼굴이 붉어지기 때문이었다. 며칠 피하면 괜찮아질 거라는 근거없는 일념 하나로, 형원은 기를 쓰며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현우를 피해 다녔다. 형원의 레이더는 과민하게 작동했다. 현우가 제 자리로 올라치면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도망을 치거나, 물건을 건네주다가 몸이 닿을 것 같으면 황급히 내던지고 자리로 돌아갔다. 눈을 피하는 건 물론이고 현우가 하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동선이 겹치지 않게 다니느라 형원은 나름 힘들게 하루하루를 잘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를 모르는 현우 쪽은 얘기가 전혀 달랐다. 잘 지내던 동료가 갑자기 이상행동을 하니 현우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루 이틀은 그런가보다 했지만 벌써 3일째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게 분명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퇴근길에 마주친 형원을 붙잡아 얘기 좀 하자고 했지만, 화들짝 놀란 형원은 '일이 남아서 다시 들어가 봐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다시 사무실로 줄행랑을 쳤다. 싫다는 사람을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던 현우는 불편한 마음을 한가득 짊어지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현우를 피하려고 사무실로 돌아갔던 형원은 벌써 3시간째 자리에 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사무실이라 이불은 없지만 형원은 자신의 행동을 곱씹으며 심정적으로 이불을 뻥뻥 차댔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렇게 피하는 일을 더는 못 해 먹겠다 싶다가도 현우를 보면 속절없이 심장이 뛰어 도무지 멀쩡한 행동이 나오질 않았다. 지금쯤이면 마주칠 일 없겠지.




-




 마주칠 일 없기는 개뿔. 형원은 지금 센터 앞 포장마차에 앉아 잔뜩 취한 현우 앞에 마주 앉아있다. 분명 계획은 완벽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 나왔건만,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던 현우의 눈에 띄어버려 붙잡히고 말았다. 잔뜩 취한 현우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붙잡혀 끌려온 형원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빈 소주병이 세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혼자서는 한 병도 힘들다고 했었는데, 벌써 세 병을 비운 거야?

"채 대리...요즘 왜 자꾸 나를 피해..."

 현우는 풀린 눈으로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그러면 말을 해줘... 내가 잘못했어...."
"과장님..."
"너무.. 힘들다... 나는 진짜...채 대리랑 잘 지내고 싶은데...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다 떠나고... 나는 이제 채 대리 밖에 없는데..."

 한참을 혼자 얘기하던 현우의 고개가 조금씩 아래로 떨어지더니 이내 테이블 위에 왼팔을 뻗고 엎드렸다. 스르르 눈을 감더니 푸우 하고 한숨을 뱉었다. 형원은 그제서야 똑바로 현우를 볼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힘든 회사 생활 견딜 수 있게 해준 과장님한테. 이렇게 술 먹고 힘들다는 말까지 하게 만들다니. 형원은 그 사실이 너무 미안하고 속상해서 눈가가 붉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현우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어렵게 눈을 들자 마주앉아 서러운 얼굴로 소리 없이 줄줄 울고 있는 형원이 눈에 보였다. 현우는 어렵게 몸을 일으켜 왼손으로 턱을 괴고 마주 앉은 형원을 올려다봤다.

"형원아...."

 형원은 화들짝 놀라 현우를 바라봤다. 처음이었다. 직책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른 건. 현우는 오른손을 들어 형원의 얼굴을 감싸 쥐고 엄지로 눈가를 닦아냈다.

"왜 울어."

 마치 품에 안긴 것 같은 뜨끈한 온기가 얼굴에 닿아오니 형원은 꾹꾹 눌러 참아온 감정이 더 북받쳐 올랐다. 이미 많이 울어서 목구멍이 잔뜩 조이고 불편한데도 눈물은 더 쏟아져 나왔다.

"울지마..."
"내가... 더 잘할게....너한테...."

 눈물을 닦아내던 손이 스르르 내려가고 이내 현우의 눈꺼풀도 함께 감겼다. 현우가 완전히 취해 잠들고 나서야 형원은 어렵게 울음을 그쳤다.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선히 부는 여름 밤바람에, 곤히 잠든 현우의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겨우 하나 남은 부서원을 좋아하게 돼서 큰일이다.





09



 요 며칠간의 자신은 정말 최악이었다.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었다. 동료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스스로가 너무나 최악으로 느껴졌다. 형원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왜 이렇게 행동했던 건지 현우에게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결심이 섰다면 지체할 필요가 없다. 형원은 밤잠을 설치고 일찍 출근을 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서 앉아 있던 형원은 문가에서 기척이 들리자 벌떡 일어났다. 구둣발이 의자 다리에 걸려서 형원이 휘청거리는 동안 사무용 의자가 쿠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리고 뒤이어 형원도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주하기가 편했다. 요 며칠 동안 자신을 힘들게 했던 건 현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음이 방증 된 것이다. 가만히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사무실이 어두워졌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방금 출근한 현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해?"
 당황한 형원은 벌떡 일어나서 머리를 정리하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후 현우에게 외쳤다.

"과장님!"
"...어?..."
"아이고, 목소리가 너무 컸죠. 죄송해요. 저... 드릴 말씀 있어서요. 퇴근하고 시간 좀 내주세요."

 오전 내내 업무를 하다 바쁜 일이 끝나 여유가 조금 생긴 현우는 제 자리에서 3미터쯤 떨어진 형원의 자리를 응시했다. 형원은 서류를 작성 중이었는데, 뭔가 잘 안 풀리는지 미간을 잔뜩 찌뿌리고 거북목이 되어선 얼굴을 모니터 가까이에 들이대고 업무에 한창이었다. 할 말이 있다고? 어제까지 그렇게 피해놓고선. 도대체 무슨 일일까. 자리에 앉아 고민하던 현우는 컴퓨터가 절전모드로 변할 때까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 퇴사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아, 이번엔 내가 도망쳐야 하나.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화들짝 놀란 현우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센티넬-가이드 연합 센터 본부 행정실입니다. 아, 네 서장님. 손현우 과장입니다. 네? 지금요? 잠시만요. 채 대리, 뉴스 좀 틀어봐."
"뉴스요?"
"얼른!"

 형원은 다급히 유튜브로 들어가 실시간 뉴스를 검색했다.

'한강대교 투신자살소동'

 공중파 뉴스의 썸네일을 클릭하자 현장에서 마이크를 들고 보도 중인 기자와 누군가 다리 난간에 올라서 있는 영상이 송출되고 있었다.

'...한강대교 위에 한 시민이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이 여성은 약 2시간 전 쯤, 한강대교를 올라가다 이를 목격한 시민에 의해 경찰에 신고됐습니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으며 안전 확보를 위해 한강대교 남단 4차선 중 2차선을 통제하고 구조를 위해 나섰습니다. 한편, 해당 여성의 신원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으며 어떤이유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지, 또 어떤 요구조건을 내놓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MBS 뉴스, 조이준입니다.'

"저 사람, 센터 소속인 것 같아. 서장님이 일반인 신원조회 해봐도 나오질 않는대. 그래서 방금 센터 측에 공문 보냈다는데 너무 급해서 일단 이쪽으로 연락했대. 이름은 서진아. 시스템 들어가서 조회 좀 해볼래?"

 현우는 수화기의 아래쪽을 손으로 가리고 최대한 침착한 어투로 형원에게 업무 지시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서장과의 통화에 집중했다.

"서장님, 요구조건은요? 얘기하던가요?"
- "하.. 그게 말이죠.. 시신을 찾아달랍니다."
"시신이요?"
- "전투 중에 동료가 죽은 건지 어쩐건지... 울면서 여타 설명도 없이 시신을 찾아달라는 말만 하는데, 손 과장님도 알다시피 우리 경찰 측은 연합 쪽에 협조 요청할 권한도 없고.. 입지도.. 이것 참 어떻게 해야될지.."
"알겠습니다. 일단 저희가 확인해보겠습니다. 넵."

 형원은 다급하게 프로그램을 열어 신원조회 시스템으로 들어갔다. 형원이 손을 달달 떨며 헛손질을 하는 동안 현우는 서장과의 통화를 마무리하고 형원의 자리로 왔다. 현우는 형원이 앉은 의자 위쪽을 붙잡고 몸을 숙여 모니터를 응시했다. 형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있다가 현우의 얼굴이 제 얼굴 곁으로 온 것을 인식하고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내 정신을 다잡으며 검색창에 이름을 써넣고 엔터를 눌렀다.

"서..진아. 가이드예요! 기록을 보니까.. 병원 치료 때문에 의병 제대를 했다고 나와요."

 형원은 프로필에 나온 사진을 보고 낯이 익은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근데 이 사람.."
"왜? 아는 사람이야?"

 형원은 말없이 아래 내려놓았던 인터넷 창을 다시 띄웠다. 뉴스 영상에는 난간에 올라간 여성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는데, 멀리서 찍은 영상인지 화질이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얼굴에는 블러처리까지 해 둔 상태였다. 눈을 잔뜩 찌푸리고 화면을 보던 형원은 여성의 손 언저리에서 휘날리는 무언가를 보고 마침내 기억을 해냈다.

"그날 시위요! 시위 현장에서 봤어요!"
"시위할 때? 어느 쪽 진영이었는데?"
"그게.. 어디도 아니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둘 중 어디에도 못 끼고... 가운데서 혼자 서 있었어요. 그래서 기억해요."
"아.. 그럼 저 사람이 원하는 게 뭔지 어떻게 알아내지?"

 형원은 당시의 장면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손목에 묶여있던 손수건. 체념한 표정. 공허한 눈빛. 그 눈이 어딜 향하고 있었지..?

"이 사람, 매칭됐던 페어가 있어. 물 속성 센티넬 윤해나. 각인 신고도 되어있고, 근데... 실종 상태인 걸로 나오네."
"실종이요? 그럼 시신을 찾아달라는 건, 이 사람 얘긴가봐요."
"...뭔가 좀 이상한데. 기록을 보면 마지막으로 투입된 작전이 투르크라비니아 폭탄테러인데, 실종됐다는 게 말이 안 돼."
"그게 왜요?"
"...그 작전에서는 사망자나 실종자가 안 나왔어."

 형원은 현우의 말을 듣고 뒷통수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럼 이건 대체..."
"분명 뭔가 있어.. 이거 한번 찾아볼래? 그-,"

 현우가 뭔가 생각난 듯 말을 하는 도중에, 천장의 전등이 깜빡거리더니 사무실 불이 꺼지고 이내 모니터가 새까매졌다. 정전이다.

"젠장, 하필 이럴 때."
"제가 연구소 연락해 볼게요."

 형원은 무심코 자리에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가 아차 하고 내려놓고는 휴대폰으로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입사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우는 캐비닛으로 가 작전이 있던 시기의 서류철을 찾아냈다. 서류뭉치를 뒤지며 사건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찾아보려 애썼다.

"과장님! 지금 연구소에서 훈련 중인 전류 센티넬이 폭주했대요. 센터 전부 다 정전이라는데요? 금방 복구될 것 같지가 않대요."
"하아... 왜 하필. 할 수 없지. 문서보관창고로 가자. 빨리."

 현우는 보다만 서류뭉치를 버려두고 재킷도 챙기지 않은 채, 흰 셔츠 차림으로 검은 타이를 휘날리며 뛰어나갔다. 형원은 먼저 다급히 사무실을 뛰쳐나간 현우의 뒤를 따라 달렸다.





10



 문서보관창고는 센터 설립부터 지금까지의 문서들을 모두 지류로 출력하고 정리해 보관하는 곳이다. 처음엔 왜 굳이 문서들을 지류로 보관해 두는지 의문이었지만, 센티넬의 폭주를 몇 번 경험하고 나서는 이해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전기 센티넬이 폭주할 경우 급상승한 전압을 이기지 못한 전선들이 모두 망가져 센터 내 전력공급이 중단된다. (그럴 때 마다 비상전력 복구를 도와주는 것도 그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업무 체계가 디지털화되어있는 현대사회에서 전기가 나가면 업무에 크게 지장이 있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데이터로만 보관한다면 물론 편하겠지만, 작게는 정전, 크게는 침략이나 테러를 당하게 됐을 때 센터 소속의 인명 정보나 그 어떤 내용도 확인 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지류로 서류를 많이 적재하고 보호하기 위해 커다란 금고 같은 형태로 지어졌다. 그러한 이유로 센터 내의 문서는 모두 파일과 지류로 중복보관하는 것이 센터 내의 불문율이다.
 두 사람은 문서보관창고 앞에 도착해 계기판에 지문을 가져다 댔다.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나자, 현우는 문고리를 잡고 두껍고 무거운 문을 밀어 열었다. 창고 안에 들어선 두 사람은 천장까지 닿아있는 적층식 선반에 빈틈없이 꽉 차 있는 서류들을 보며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 갑갑한 창고 내부에서 끝없이 늘어선 선반들을 뒤져 서류를 찾아내야한다.

"센티넬 실종 관련해서 의심 가는 사건이 몇 가지 있거든? 나눠서 찾아보자. 내가 카톡으로 큼직한 사건이랑 날짜 써서 보내놨으니까, 그거 보고 찾으면 돼."

 한참 동안 서류를 찾던 형원은 관자놀이에서 뺨으로 흐르는 땀과 답답한 공기가 견디기 힘들어 서류뭉치로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과장님, 근데... 여기 점점 더워지는 거 같지 않아요?"
"어. 내부 온습도 조절기 때문에 비상용 발전기가 있긴 한데, 이런 상황에선 아마 온도조절은 못 하고 습도만 최소한으로 유지될 거야."

 형원은 사다리를 타고 옆 선반 위쪽 서류를 찾아보는 현우를 무심코 올려다봤다. 세상에. 땀이 얼마나 난 건지 셔츠가 다 젖어서 투명하게 비칠 정도였다. 형원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해졌지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저었다. 정신 차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형원은 헛기침을 하고 커다란 두 손으로 말랑한 양 볼을 챱챱 쳤다. 눈을 뜨고 다시 보니 사다리에 잠시 앉아 파일을 뒤지는 현우의 얼굴 역시 땀이 흥건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형원은 창고 내부를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에서 오래된 선풍기 한 대를 발견했다. 파란 날개에 누렇고 네모난 스탠드. 형원은 몸을 숙여 선풍기를 유심히 봤다. 뭐야? 또 골드스타네. 참나. 센터장이랑 골드스타 사장이랑 친구라도 돼? 근처에 있는 콘센트에 꽂아보니 털털거리는 소리가 나지만, 날개가 돌아간다. 형원은 선풍기를 들고 현우가 있는 곳으로 갔다.

"과장님! 이거라도 쓸까 봐요."
"그거 작동이 돼?"
"시원한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용케 돌아가긴 해요."
"그래. 없는 것보단 낫겠지."

 위잉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파란 선풍기 날개.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움직이며 돌아가는 고물 선풍기를 앞에 두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에 앉아 파일을 뒤지는 이 상황이 다소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형원은 더운 숨을 후우 내뱉고 다시 서류뭉치를 뒤적거렸다.

'경위서'
"어...? 찾았다! 과장님! 찾았어요!"
"진짜? 봐봐."
"근데 이거...우리 실장님 사건같은데요...?"
"뭐?"





11



 현우는 운전면허를 취득한 이래, 처음으로 과속을 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니, 한시가 급했다. 앞서가는 차들을 좌우로 피하며 달리느라 각그랜저가 지나간 자리에는 옅은 스키드마크가 남았다. 이윽고 현우의 차는 한강대교로 들어섰다. 가이드는 다행히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소방차와 경찰차들이 모인 곳이 점점 가까워졌다. 현우는 더 세게 엑셀을 밟았다. 현장 주변에 쳐놓은 노란 폴리스라인 테이프가 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프를 향해 돌진했다. 차장 아래쪽 구석에 끊겨서 나풀대는 테이프가 붙었다. 현우는 라인 안쪽으로 진입해 끼익 소리가 나도록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순경들이 막아섰지만, 현우의 얼굴을 아는 서장과 반장이 제지하자 현우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손 과장님!"
"상황이 어떤가요?"
"저기, 보이십니까? 아직 투신하려는 움직임은 없긴 합니다만.. 뭐 찾으신 거라도 있습니까?"
"아, 확인해 봤는데, 저희 측에서는 저 사람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
"시신이 없습니다."

 서장은 그 말을 듣고 안타까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요. 작전중에 유실됐나 보군요.. 이걸 어째.."
"아뇨, 말 그대로 시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




 같은 시각, 형원은 센티넬 불법 도박장에 도착했다. 건물은 관리되지 않아 몹시 낡은 느낌이 가득했다. 흰 페인트였을 외벽은 군데군데가 다 벗겨져있었고, 빗물과 담쟁이덩쿨의 마른 가지가 뒤덮여 얼룩덜룩했다. 어둡고 음산한 폐건물 지하에서, 플래시라이트를 손에 든 형원은 두려움을 안고 어렵게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뎠다. 확실히 일전에 관련인물들이 모두 잡혀 들어간 이후로는 도박장 영업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미 장소를 들켰으니 여기서 다시 도박장을 여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곰팡이 핀 천장 모서리에는 커다란 거미줄이 가득했고, 축축한 바닥에는 쥐가 돌아다녔다.

"흐이익!"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해서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가자, 건물 깊숙한 곳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낡은 쇳소리가 나는 문을 조심스레 열자, 어둠 속에 힘없이 앉아있는 서너 명의 인영이 보였다.

"저기....실례합니다...."

 너무 작게 말했나 싶어 형원은 소리를 조금 키웠다.

"저기.....혹시... 윤..해나 씨...? 계신가요....?"





12



"윤해나 씨, 죽지 않았습니다."
"네? 뭐라고요?"
"살아있습니다. 서진아 씨 배우자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죽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확성기 켜서 전달해 주세요. 얼른요!"

 서장은 뜻밖의 사실에 놀라워했지만 짐짓 난처한 태도를 보이며 현우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확실합니까?"

 현우는 바로 협조할 거라 생각했던 서장의 반응이 너무나 뜻밖이었다. 한껏 예민해진 얼굴로 서장을 응시하자 서장은 짐짓 곤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게.. 경찰 측에서 센티넬에 대해 그런.. 불확실한 내용의 발언을 했다는 게 연합에 알려지면.. 우리 입장이 난처해져서 그럽니다.. 손 과장님, 저희도 하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에는 책임소재가..."
"이러다 사람이 죽으면요! 그 책임은 어떻게 지실 거죠?"

 현우는 분노에 차서 서장의 대답도 듣지 않고 뛰어가, 경찰차 앞에 서서 확성기를 쥐고 있는 경위에게 달려들었다.

"주세요."

 체구가 큰 현우의 앞에서 잔뜩 쫄아버린 경위는 서장의 눈치를 보다가 순순히 현우에게 확성기를 넘겼다.
 현우는 왼 손에 든 확성기를 할 수 있는 한 높이 치켜들고 오른손에는 확성기에 연결된 마이크를 입가에 갖다 댔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마이크의 송출 버튼을 누른 후, 배에 힘을 꽉 주고 최대한 큰 소리로 외쳤다.

"서진아 씨! 센터연합본부 손현우 과장입니다! 들리십니까!"

 현우는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육안으로 봤을 때 여자는 미동이 없었다.

"윤해나 씨 살아있습니다! 죽지 않았어요!"

 움직임이 있다. 반응을 한다. 현우는 더 큰 소리로 있는 힘껏 외쳤다.

"윤해나 씨 찾았습니다! 멀쩡히 살아있으니까! 그러니까 거기서 일단 내려오세요!"

 당혹스러운 몸짓으로 허둥대던 진아를 보고 아래쪽 차도에서 구조용 매트리스를 깔고 있던 소방대원들은 일제히 긴장했다. 지면으로 떨어진다면 살 수 있겠지만, 다리 밑으로 떨어진다면..
 한 시가 아찔한 상황에, 진아가 서 있는 다리 아래쪽에서 물보라가 일었다. 일렁이다 그칠 줄 알았던 물보라는 형체를 갖추고 점점 대교 쪽으로 뭉쳐 올라갔다. 그리고 저 멀리서 수면 위를 뛰어오는 인영이 보였다. 빠르게 뛰는 해나가 물보라 쪽으로 가까워지자 강물은 완만한 오르막길을 만들어냈고, 해나가 그 위로 오르자 위로 솟은 강물은 진아가 서있는 대교의 아치까지 올라가 닿았다. 어렵게 재회한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물 위에서 한참을 울었다.





13



 상황이 종료되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현장이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소방대원들은 구조용 매트리스를 정리하고, 현장을 통제하던 경찰들과 보안요원들도 조금씩 철수했다. 센터에서 온 연구원들은 보트를 타고 물보라가 일었던 곳으로 가 남아있는 에너지의 파장을 체크했다. 두 사람은 지면으로 내려와 뒷 문이 열린 구급차 안에 앉아 간단한 메디컬체크를 받았다. 둘 다 수척한 얼굴에 영양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의료진들이 이것저것 물어보고 체온을 재며 상태를 확인했는데, 그러는 중에도 두 사람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해는 넘어갔지만 지면은 아직도 뜨거웠다. 형원과 현우는 각그랜저에 몸을 기댄 채, 서장이 사다 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진짜 다행이다.. 그쵸."
"그러게. 근데 진짜 거기 있었던 거야? 윤해나 씨 말이야."
"네. 처음에는 허탕 친 줄 알고 큰일 났다 싶었는데요, 서진아 씨 이름을 얘기하니까 반응을 하더라고요."
"처음엔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안 믿더니 영상을 보여주니까 정신을 차렸어요. 영상이 흐려서 얼굴은 안 보였는데, 손목에 하고 있던 손수건이요. 그게 두 사람에게 의미 있는 물건이었던가봐요."
"그랬구나. 근데, 살아있으면서 왜 돌아오지 않았던 거래?"
"그게... 투르크라비니아에서 폭탄을 피하지 못해서 크게 다쳤대요. 근데 그걸 기회로 실장님이 도박장으로 빼돌린 모양이에요. 당시 윤해나 씨는 부상이 심각한 상태였는데 도박장에서는 센티넬들이 다치면 공용 가이드한테 억지로 가이딩을 받게 했대요. 매칭률이 떨어지니까 상성도 안 맞고, 그러니 당연히 회복이 느렸고.. 약물로 어렵게 의식을 차렸는데, 그때 장부 들고 도망치던 실장님을 마주친 거죠. 여기가 어디냐, 자긴 센터로 돌아가야 한다 했더니 연합도, 센터도 전부 무너지고 가족들도 전부 죽었으니 돌아가봐야 소용없다고 거짓말을.. 했나 봐요."

 현우는 안타까운 사연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시엔 정신도, 몸도 온전치 못한 데다가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서... 체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고요. 그때 이미 관계자들은 다 도주하고.. 텅 빈 도박장 안에 있는 쪽방에서 같은 처지의 센티넬들이랑 같이.. 지냈대요."

 현우는 씁쓸한 얼굴로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한 사람의 일탈이 너무 많은 고통을 불러왔다.

"연구소에 연락해서 남은 센티넬들도 센터로 데려가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잘했다. 고생 많았어. 진짜."
"과장님도요."
"근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오토바이라도 탔어?"
"여차하면 그려려고 했는데요, 윤해나 씨가 있던 불법도박장이요. 위치가 탄천 유수지 근처더라고요. 물 위로 가는 게 더 빠르다면서 수면을 올려서 길을 만들었는데, 저는 그 위에서 빠르게 뛸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 저를... 공주님안기로..."

 그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터진 현우는 도통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한바탕 배를 부여잡고 웃던 현우는 민망해서 새빨간 얼굴로 쪼그려 앉아버린 형원을 일으켜 세우며 겨우 웃음을 그쳤다. 두 사람은 의료진과 연구원들의 메디컬체크가 완료된 후, 병원으로 이송됐다. 떠나는 구급차의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후련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14



 한강 앞 계단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벌써 다리 위의 지하철을 4대나 보냈다. 할 말이 있다던 형원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니 못 해도 10분은 지난 것 같았다. 현우가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할 말 있다며. 뭔데?"

 형원은 한강을 바라보며 숨을 한 번 크게 내 쉬고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저한테 해준 사랑 얘기요. 뭐였어요?
"응?"
"그때요. 한강에서."
"아.. 그거?"
"말해주세요."
"왜 그래 갑자기."
"...."
"무슨 일 있었어?"
"...그날, 한강에서요. 눈 감으면 그날 그 장면이 계속 떠올라요."
"..."
"과장님이 말해준 사랑은 뭐였을까. 알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 얘기를 나한테 해주는 과장님은 대체 어떤 사랑을 했던 걸까 궁금했고. 사실은요, 질투가 났어요. 그 상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게... 싫었어요. 그 상대가 저였으면 했어요."
"..."
"저 과장님 좋아해요. 좋아하게 됐어요. 그래서 피했어요. 피하면 마음이 좀 식을까 싶어서요. 근데 잘 안 됐어요. 죄송해요."
"형원아."
"..."
"그런 건, 하지 말자."

 아. 거절이구나. 형원은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자 입이 썼다. 눈을 감고 아래로 고개를 떨궜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고개를 들면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릴 것 같아서였다. 잠이 안 오던 밤들을 지새우며 수 없이 고백하는 장면을 시뮬레이션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상상과 너무도 달랐다.

"과장님이 거절해도 상관없어요. 그냥,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감추고 피하면서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말한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듣고 흘리세요 그냥. 저도 이제 마음 접을 수 있을 테니까."

 형원은 최대한 현우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 애썼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형원이 앞을 보고 일어서자 현우가 뒤에서 형원의 손을 잡았다.

"그건... 같이 걷기 너무 힘든 길이잖아."

 형원은 눈물 범벅된 얼굴을 하고선 뒤를 돌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현우를 바라봤다.

"나는 너 힘든 거 싫어. 그러니까 우리, "
"..."
"선선한 여름밤 같은 사랑을 하자"









후일담



 큰 사건이 있었으니 두 사람은 더 바빠졌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진술을 하고, 사건보고서를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원래 하던 업무들이 잔뜩 쌓여버렸으니, 한동안은 어쩔 수 없이 야근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제법 나쁘지는 않았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좋아서 그런가? 아니면, 좋아해서? 뭐, 아무튼 좋았다. 그들은 늘 그렇듯 출근해서 바쁘지만 평온한 날들을 누리고 있었다.

"과장님,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는 거 알았어요?"
"뭐,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 각인까지 한 부부잖아."
"과장님 그 애가 누군지 들으면 깜짝 놀랄걸요?"
"누군데?"

-쾅쾅!

"아저씨!"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놀라서 문가를 보자, 고운 보자기에 싸맨 상자들을 제 몸만큼 쌓아 올려 들고오는 윤지안 훈련병이 있었다. 워낙 키가 작아서 흡사 다리 달린 상자더미가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와 달리 컸던 문소리의 의문이 풀렸다. 지안은 노크할 손이 없어서 발로 문을 찬 거였다.

"아이구!"

 놀란 두 사람은 급히 일어나 짐을 나누어 받아 들었다. 그제야 상자에 가렸던 얼굴이 보였다. 지안은 얼굴색도 많이 밝아지고 살도 붙어서 이제 제법 센티넬 유니폼이 어울렸다.

"아니 이걸 어떻게 여기까지 들고 왔어요?"
"몰라요? 요즘 맛있는 거 많이 먹어서 그런가? 힘 짱쎄짐. 여기 급식 존맛이에요. 아, 이거 할머니가 갖다 주래요. 근데 지금 몇 분이에요? 헐, 저 훈련 있어서 먼저 갈게요!"

 인사도 않고 제 할 말만 줄줄 늘어놓더니 쌩하니 가버린 지안 때문에 두 사람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서로를 마주 봤다. 눈이 마주치자 작게 웃음이 터졌다. 상자더미를 책상 위에 올린 후 각자 상자 하나씩을 붙잡고 보자기의 매듭을 풀었다.

"매번 감사해서 어째. 별 일도 아닌데."
"지난번에 보내주신 떡이랑 간식거리도 아직 남았는데, 오 이거 뭐지? 새우장? 대박이다."
보따리를 풀던 형원은 형원은 방금 쏜살같이 지나간 장면을 되새기며 말했다.
"윤지안 훈련병이요.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이제 제법 그 나이로 보이네요."
"그러게. 이제야 좀 애 티가 나지?"
"그니까요. 진짜 너무 귀엽다. 쪼끄매가지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밖에서 뜀박질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지안이 다시 돌아왔다.

"헐! 저 할 말 있었는데 까먹을 뻔."

 지안은 잠시 말을 않고 서있다가 진지한 얼굴을 하곤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두 사람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진짜. 진짜루요. 저 이제 진짜 갈게요!!"




-




 두 사람은 퇴근 후 종종 한강으로 가 여름밤의 여운을 즐겼다. 조금 있으면 가을이 올 테니, 이 선선함을 다시 느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형원과 현우는 하루의 끝에 나란히 앉아 캔맥주를 한 모금씩 넘기며 종알종알 일상을 나눴다.

"뭐? 진짜야?"
"네. 윤해나 씨랑 서진아 씨 딸이 윤지안 훈련병이래요."
"와.. 세상 진짜 좁네. 잠깐, 그러면 서진아 씨는 입원 중이었던 거 아니야?"
"맞아요. 근데 옆 방 환자가 난동을 부려서 의료진이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도망쳤대요. 병원 측에서는 자기들 과실이니까 보호자한테 연락 안 하고 몰래 찾고 있었구요."
"와, 어떻게 그걸 숨겨? "
"그러니까요!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아무튼 가족관계 알고 저 진짜 놀라 자빠질 뻔했잖아요."
"아~ 지난번에 사무실에서 누워있던 것처럼?"
"아잇! 진짜."
"알았어. 안 놀릴게."

 현우는 안 놀린다면서도 눈이 휘어지게 웃고 있었다.

"큼큼. 암튼 그니까 제 말은, 그 가족들이 얼마나 과장님한테 고맙겠어요."
"누가 들으면 나 혼자 일한 줄 알겠다. 같이 고생했잖아."
"그래도요. 과장님 아니었으면 못했어요 저는."
"아이, 비행기 그만 태워. 나 떨어지겠다."

 웃으며 고개를 숙인 현우의 귀 끝이 붉어져있었다. 의외로 칭찬에 약한 타입인가? 나름 약점을 잡은 것 같아 형원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좀.. 귀엽기도 하고.

"근데 형원아."
"네?"
"언제까지 과장님이라고 부를 거야?"
"아.... 그게.. 입에 붙어가지고..."
"그럼 하고 싶을 때 해."

 형원은 뭔가 결심한 듯 두 손으로 시뻘개진 얼굴을 가리고 개미코딱지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현우는 그 모습을 보고는 반달눈이 되어서 한바탕 웃어댔다. 형원은 그 모습이 좋았다. 검은 수면 위에 반사된 야경과 한 프레임에 담긴 현우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러다 문득, 형원은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생각나서 진지한 얼굴로 현우를 보며 물었다.

"저 근데 궁금한 거 있었어요. 근데,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뭔데?"
"그 사랑은... 누구랑 했던 거예요?
"아 그거?"

 형원은 잔뜩 긴장한 채 현우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의미두지 말자. 의미두지 말자. 어차피 지나간 일일테니.

"내 얘기 아니야."
"으에? 네? 뭐라고요?"
"우리 아버지 얘기야. 나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셨거든."

 아.. 형원은 이 질문을 한 자신을 이불에 꽁꽁 싸서 멍석말이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질투를 했던 게 너무 창피하고 쪽팔렸다.

"아.. 죄송해요. 진짜... 하... 내가 왜 그랬지. 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앞으로도 이걸로 계속 놀리고 싶을 거 같긴 하다."

 미안함과 민망함에 고개를 못 들던 형원은 개구진 웃음을 짓는 현우를 보니 조금 안심이 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나 더 묻기로 했다.

"그럼 저 하나만 더요."
"왜 여름밤이었어요?"
"응?"
"그날 저한테.. 그랬잖아요. 여름밤 같은.. 사랑을... 하자면서요."
"사실은, 나도 그날이 자꾸 생각나서. 그래서 그랬어."

 현우는 귀가 잔뜩 붉어진 채로 뒷목을 매만지며 쑥스럽게 말을 이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어려운 사랑을 보면서 컸거든. 사랑이 저렇게 힘든 거라면 하고 싶지가 않았어. 그래서 아무한테도 곁을 안 주고 최소한의 예의만 차리면서 살았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게, 나한테는 썩 힘든 일이 아니었어. 그래서, 사무실 사람들 다 떠났어도 일 많은 것만 빼면 제법 버틸만했으니까… 근데 하루는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단 둘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상상을 해봤거든? 절대로, 같은 마음이 안 들더라. 너라서 그랬던 걸 그 때 알았어."

 일렁이는 형원의 눈빛을 보며 현우는 수줍게 웃었다.
"그래도, 내 마음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냥 그렇게 같이 보내는 하루하루가 좋았고 그거면 충분했으니까. 그래서 쌓인 업무도 이를 악물고 해냈어. 너, 힘들어서 퇴사한다고 할까 봐."

 세상에. 형원은 현우가 그런 마음일 줄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자신이 힘들어서 사표를 낼 까봐 일을 더 많이 해왔다는 부분에서 형원은 흡사 청혼 받은 사람처럼 감동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로봇이라고 했던 거, 취소...

"은연중에는 나도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아. 할 줄을 몰라서 결국은 그렇게 못 했지만."

 진솔하게 마음을 꺼내놓는 현우는 담담하고 침착했다.

"네가 먼저 고백해 줘서 좋았어 난."

 선선히 부는 바람에 현우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나도 그날 밤이 되게 좋았나 봐. 너처럼."

 형원은 말랑한 볼을 잔뜩 올린 채 미소를 지으며 현우의 손을 잡았다.

"여름밤이 좋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 알았어요."

 형원은 맑게 웃는 현우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이, 선선하게 살랑거리는 여름밤이 너무 좋아서 1년 365일이 전부 여름이었으면 좋겠다고.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