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

수박바

 형원아, 나는 오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평소에는 시켜도 안 한다고 뭐라고 했지만, 그런 날이 있잖아. 무언가 털어놔야 할 것 같은 밤. 술 안 마셨어. 진짜. 아직 이거 건배만 하고 입도 안 댄 거 알지. 아 그리고 이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너도 알다시피 나 말주변이 좋지 못하잖아. 물론 너는 늘 웃겨 죽지만. 그건 네 웃음 포인트가 이상한 거고. 보통 남들은 그러지 않아. 나는 굳이 말하자면 재미없는 편이야.


 우리 지난번에 갔던 무인도 생각나? 그래, 인천 그 어디 섬 근처에 있는 진짜 무인도. 자컨 찍다가 그래, 벌칙인지 혜택인지 낙오인지 여튼 형원이 너랑 둘이 갔던 거기. 나는 그냥 무인도에 멤버 중에 같이 가야 하면 누구랑 갈 거냐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이래서 말조심해야 하는 건데-, 형원이 너랑 가서 소주나 한 병 하지 뭐 하고 적었던 건데 그게 그렇게 돌아올 줄 몰랐다고 정말. 사실 그 인터뷰 전날 우리 같이 회에다가 소주 한 병 해서 그렇게 썼던 거 같기도 한데. 아무튼 그렇게 너랑 무인도에서 1박 2일을 보내라고 할지는 몰랐지. 너나 나나. 나도 황당했는데 너는 더 황당해했잖아. 그때 너 그 입 벌리고 있다가 현실인지 꿈인지 뺨 때린 거 클로즈업돼서 네 팬들이 마음 아파했어. 어떻게 아냐고? 나도 그 정도는 모니터링하지. 너는 안 그렇게 생겨서 손이 맵다니까. 손이 커서 그런가. 네 뺨칠 거면 하던 대로 내 팔뚝이나 쳐. 얼굴도 작은 게 칠 때가 어디 있다고. 아, 맞아. 그때 사실 나는 나 때문에 만인 줄 알았는데, 너도 여행 가면 누구랑 가고 싶냐는 말에 날 골랐다며. 지켜줄 것 같다고. 그래서 둘이 매치된 줄도 모르고 있었잖아. 알면 좀 덜 미안했을 것 같은데, 미안해하는 줄 몰랐다고? 네가 다 끓인 라면에 모래 떨어트렸어도 아무 말도 안 하고 먹었잖아. 나는 괜찮을 줄 알았다고? 아무리 그래도 나도 모래까지 괜찮지는 않지. 그래. 아무튼 우리만 남겨두고 스탭들 배 타고 떠나는데 그래도 당연히 나머지 스탭들 숨어 있을 줄 알고 너랑 온 섬을 다 뒤져도 진짜 아무도 없어서 방송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사실 캠을 그렇게 구석구석 숨겨놨을 줄도 모르고. 나중에 편집하느라 고생했다고 구박 엄청 받았는데, 그치.

 날은 덥고 모기도 많고 바닷바람은 끈적거리고 그때 진짜 최악이었는데 또 너무 황당하니까 몸이 저절로 움직이더라고. 스탭들이 던져놓은 텐트랑 생존용품 찾아다니느라 땀 한 바가지 흘렸던 거 기억하지. 지금 와서 얘기하는 건데 너 정말 생존능력은 없더라. 어떻게 텐트를 뻔히 눈앞에 두고도 못 찾는지. 나도 사실 어디서 그렇게 좋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너 보니까 약간 아, 내가 안 하면 진짜 안 되겠다 싶어서 더 열심히 한 것도 있어. 유용한 기술이라고는 모기 잡는 거 정도인데, 거기 모기는 잡아서 해결될 정도가 아니어서 정말 쓰임이 0에 수렴했던 거 너도 인정했잖아. 네가 그때 그랬잖아. 형한테 더 꼭 붙어있어야겠다고. 무인도 갈 때 같이 가고 싶은 남자 1위는 역시 다르다 같은 이상한 소리 하느라고 텐트 치는 데 한 시간은 걸렸잖아. 네가 그만 웃고 폴대를 잘 잡았으면 삼십 분도 안 걸렸을 거 같은데, 같이 웃지 않았냐고? 그럼, 너 웃는데 안 웃기냐. 우리는 이래서 안 돼. 여튼 물고기 있는지 본다고 물에도 들어가고. 사실 둘 다 날생선을 칼도 없이 뭘 할 수도 없을 텐데 왜 물고기에 꽂혔나 몰라. 거기 스탭들이 숨겨놓고 갔던 낚싯대 찾아서 네가 의기양양하게 나한테 들이밀면서 오늘 회 먹여준다고 했었는데. 결국 한 마리 잡았었지. 엄청 작은 거긴 했는데. 그거 사실 내가 물 밑에서 몰아줬던 거 너 모르지? 안다고? 어떻게? 아 내가 물에 엎드려서 손으로 물고기 네 낚싯대 쪽으로 미는 거 봤어? 나는 또 완전범죄라고 생각했는데. 야 말을 하지 그랬냐. 형도 얘기 안 하지 않았냐고? 그치 나는 너 자존심 상할까 봐. 그 얘기 때문에 지금 심각하게 자존심 상했다고? 미안, 그래도 니가 던진 낚싯줄에 귀 걸린 거 기억나지? 나 그걸로 화 안 냈잖아. 그러니까 그냥 같이 넘어가자.

 땡볕에서 티셔츠까지 벗어 던지고 개고생만 죽어라 했는데. 그때 탄 자국 아직도 남아서 목덜미 새카만 거 알지? 일 년은 족히 갈 거 같아. 그래도 예능이긴 했는지 예민해지기 직전에 열어보라고 한 쪽지대로 따라갔더니 아이스박스에 먹을 거랑 소주 몇 병 있었잖아. 그때 정말 기뻐 보였다고? 너 그때 소주병에 뽀뽀하던 거 다 봤어, 인마. 그래서 여하튼 해 질 녘에 자리 펴고 소주 한 잔씩 하니까 좋았잖아. 거기 경치 하나는 정말 끝내줬는데. 거기 사실 무인도 아닌 거 알았어? 어느 회사에서 샀대. 리조트 올린다나 봐. 아깝다. 그치. 개고생도 추억이라고 또 그렇게 사라진다면 아쉽더라. 리조트 되면 둘이 가보자고? 그래, 그러지 뭐. 아무튼 그때 너랑 둘이 캠핑 의자 앉아서 정말 많이 했는데. 나도 그렇지만 너도 사실 말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잖아. 나랑 있어서 개중에 많아 보이는 것뿐이지. 그래도 그날은 그냥 말이 끊임없이 나왔던 거 같아. 우리 둘 다 다음날 목 나가 있었던 거 알지. 아직도 스탭들은 너랑 나랑 카메라 찾아서 끄고, 밤새 블투 노래방 타임 가졌다고 의심하더라.


 그날 말이야, 선셋 엄청났던 거 기억하지? 정말 새빨갰잖아. 어떻게 그 핑크빛 하늘을 새빨갛다고 표현할 수 있냐고? 아니 정말 그때 유독 빨갰잖아. 내가 태풍오기 전에 노을이 엄청 빨갛다던데 같은 얘기 해서 너 그때도 화냈어, 형원아. 분위기 깬다고. 내가 표현이 비록 이래도 그날 석양은 좀 특별했어. 바닷가에서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랬을까. 해는 사실 매일 지는데도 유난히 특별하게 넋을 놓게 되는 날이 가끔 있는데 그날이 그랬잖아. 너도 그런 거 같았어. 그렇게 압도적인 풍경은 정말 오랜만, 아니 처음인 것도 같았어. 그래서 너도나도 말도 잊고 멍하니 한참 봤을 거야. 시간이 어떻게 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불타는 것처럼 온 세상이 붉게 빛나는데 오직 들리는 소리라고는 파도 소리만 가득한 순간. 가만히 있던 네가 그때 그랬어.

‘형, 세상의 끝에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지 않아요?’


 세상의 끝,

 그곳에 마치 가본 적 있는 것처럼. 둘이 남겨진 것 같다면서 혼자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분명 같은 바다를 보고 있는데 훌쩍 어디론가 멀리 가버릴 것 같이 네가 그랬어. 그 순간 쿵 하고 무언가 내 가슴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파도 소리 때문에 너는 못 들었을 거야. 나도 사실 이게 저 멀리 바다 어디에서 들렸던 건지, 내 가슴에서 들렸던 건지 희미해. 내가 그때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듣고만 말았던 걸까. 그날 그 석양, 말을 하던 네 목소리, 노을에 물든 네 붉은 옆얼굴 같은 건 모두 너무 선명하거든. 내가 뭐라고 했는지만 이상하게도 잘라낸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아.

 우리는 모래 맛이 나는 라면을 먹고 하늘을 빼곡히 채운 별을 올려다봤잖아.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그 후로도 많은 얘기를 했는데 나는 계속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 어쩐지 얘기를 꺼냈던 너는 금방 잊은 것 같았는데. 열두 시쯤 자리를 정리하고 둘이 몸을 겨우 누일 수 있는 조그마한 텐트에 팔을 맞대고 누워서도. 계속 생각했던 것 같아.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오랜만에 편해 보이는 네 고롱고롱 잠든 숨소리를 들으면서도 계속 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어.

 새벽 두 시 넘어서였을까. 잠깐 잠에 들었다가 어쩐지 텐트 밖이 밝은 것 같아 나갔을 때였어. 깨우지 그랬냐고? 형원이 너 정말 잘 자고 있었어. 그 얇은 침낭까지 온 몸에 둘둘 말고. 저럴 거면 지퍼 채우고 안에 들어갈 것이지, 같이 덮어야 한다고 굳이 굳이 다 열고서는 결국 혼자 둘둘 말아 덮을 거면서. 발만 삐죽 나와서 내가 넣어줬는데. 그것도 모르지? 여튼 슬리퍼를 줏어 신고 밖에 나갔는데 모닥불은 여전히 잘 타고 있었어. 그래, 너랑 고생고생해서 두 시간 동안 붙였던 그 모닥불. 도시 촌놈 둘이 뭘 알겠어. 그냥 나무면 다 탈 줄 알았지. 의외로 해변에 널린 나뭇가지들은 물에 젖어 잘 타지 않는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잖아. 잘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으느라 섬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잖아. 그렇게 힘들게 줏어다 붙인 모닥불은 여전히 잘 타고 있었고, 혹시 꺼질까 싶어서 나무 몇 개를 더 불에 집어넣고 텐트에 다시 돌아가려고 했을 때였어. 내 눈에 무언가 보인 것은.

 무서운 얘기 아냐. 팔 좀 놔봐. 진짜 아니라니까. 귀신 얘기 아니야.

 그러니까 그건 달이었어. 형원아. 그래, 무서운 얘기 아니라고 했잖아. 달인데 이상하게 너무 컸어. 그러니까 비현실적으로 컸단 말이야. 그리고 이상하게도 먼바다 하늘 위가 아니라 잔잔한 수면 위를 가득 비추고 있었어. 꿈꾼 거 아니냐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왜 꿈에서 아, 이건 꿈이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있잖아.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 달이 정말 컸거든. 그래서였던 것 같아. 겁 없이 그 앞으로 다가간 것은.
 물 바로 앞까지 갔는데 밀려온 파도에 발이 젖었어. 그런데 미지근한 온도가 꿈인 것 치고는 너무 생생했어. 이상하지, 꿈인 게 당연한데 너무 생생한 거야. 정신을 차려보니 물이 무릎까지 와있었어. 그리고 그 달이 말이야, 손에 닿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어. 그래서 손을 뻗었어. 너라도 그랬을 거야. 왜냐하면 그 달빛 사이로 무언가 보였거든. 그건 마치 문같았어. 아니,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문. 그 너머 무언가 있었다니까.

 뭐였냐면 말이야


 우리였어. 형원아.

 우리가 거기 있었어. 너랑 내가 바닷가에 같이 있었어. 거기가 어디였을까. 여기는 아니었는데, 분명 기억에는 있는 곳이었어. 사실 너랑은 세상 곳곳 안 가본 곳이 없잖아. 거의 대부분 일 때문이었지만 그래도 거기 가봤는데 싶으면 당연하게도 네가 같이 있었더라고. 좋은 풍경도, 별거 없는 시시한 순간도, 특별한 순간도 되돌이켜 보면 언제나 함께였더라고. 저기도 그 언젠가 너랑 갔던 곳임에는 분명했어. 풍경은 익숙한데 그곳의 우리는 낯설었어. 아까와 다르게 내가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었고 너는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거든. 되돌이켜 보면 그런 순간이 없었을 리 없겠지만 어딘가 달랐어.

 네가 울고 있었거든.

 그래서 알았어. 저건 다른 세상의 우리였어. 네가 울었는데 내가 기억 못 할 리가 없잖아. 고집스레 앞만 바라보고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생각이 읽혔어. 세상의 멸망을 바라고 있었어. 저기의 나는. 형원아. 뭔 뜬금없는 소리냐고? 평행우주 같은 건 나도 유튜브에서나 봤지, 사실 잘 모르는데, 그냥 내 마음이, 읽혔을 뿐이야. 거기가 정말 다른 우주인 건지, 아니면 헛것을 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저기 앉아 있는 내 마음이 보였어. 우리는 헤어지고 있었어. 어딘가의 세상에서 우리 둘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는 거였어. 세상이 끝날 리 없지, 그냥 너랑 내가 끝나고 있는 순간이었어, 그건.

 형원아. 네가 아까 그랬잖아. 세상의 끝에 둘만 남은 것 같다고. 너도 들은 게 아닐까. 사실은 어딘가의 우리 둘이 보낸 구조 신호를 우리만 알아들은 건 아닐까.

 우리가 헤어지던 날도 생각났어. 바닷가도 아니었고, 너도 울지 않았지만. 그냥 평범하게 연습 끝내고 밥 먹고 차에 타서 그랬잖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네비에 목적지를 찍지 않으면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잖아. 우리는. 연애가 끝나고도 같은 곳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이어서 우리는 한참을 헤맸잖아. 그 밤들이 생각났어. 오래된 이야기인데 어제같이 선명했지. 그때의 나도 어쩌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너도 어쩌면 많은 밤을, 울었을까.

 왜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도 헤어지고 있었을까. 백 개의 우주가 있는데 그 모든 우주에서의 우리가 헤어지고 있다면 너무 슬프잖아. 헤어지고 나서도 완전히 멀어질 수도, 그렇다고 끌어안을 수 없는 애매한 간격으로 붙어있어야 하는 우리 때문인 걸까.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었어. 바다를 건너 저 멀리에서 바라봐야만 볼 수 있는 너와 나의 생각 같은 거, 우습지. 저기의 너랑 나도 평생 서로의 얼굴은 볼 수 없었을 거야. 슬픔에 질식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마치 예전의 너와 나 같이.

 그 생각을 하니까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첨벙거리며 물 밖을 걸어 나올 때까지도 꿈은 깨지 않았어. 슬리퍼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고, 모닥불은 아직도 활활 잘 타고 있었지. 텐트 안에는 네가 자고 있었고.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어. 젖은 몸을 닦아야 했는데 그냥 텐트를 열고 들어가서 자고 있는 너를 봤어. 여전히 둘둘 말고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답답했는지, 아니면 내가 없는 걸 알았는지 내가 누워있던 방향으로 돌아누워 있더라고. 침낭도 던져버리고. 그래서 그냥 무작정 너를 끌어안았어. 잠결에도 익숙하게 나를 마주 끌어안는 온기에 이상하게 눈물이 났어. 혹시라도 네가 깨면 쪽팔려서 그대로 죽어도 되겠다 싶었는데 또 한편으로는 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내 등을 토닥이는 네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런 밤이 아닐까, 생각했어. 그리고 동시에 아까 울고 있던 세상의 끝의 네가 떠 올랐어. 아직도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울지도 못하고 세상이 멸망하기만을 바라고 있던 내 등만 여전히 바라보면서.


 모기에 물린 것처럼 퉁퉁 부은 내 눈은 다행히 라면 먹고 잠든 형원이 네 덕에, 조용히 묻어갈 수 있었어. 사실 맨날 네가 얼굴 부었다 부었다 해도 잘 실감 못했는데 그날 처음으로 인정했잖아. 라면은 내가 먹은 양의 반도 안 먹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많이 부었는지. 그래도 다행이었지. 덕분에. 꿈이었는데도 슬리퍼는 결국 못 찾았잖아. 맨발로 돌아다니다가 결국 나뭇가지에 찔려서 피 조금 난 것 때문에 네가 날 업느니 어쩌느니 하다가 네가 못 일어나서 둘이 같이 쓰러졌던 것도 기억하지? 그래, 너 그다음부터 하체 운동 하루 늘렸다며. 어떻게 알았냐고? 다 듣는 방법이 있어.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한테 많은 이야기를 한다니까.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냐면. 맞아, 나답지 않게 긴 이야기였지. 이걸 왜 하필 이 밤에 여기에서 뜬금없이 얘기하고 있는지 궁금할 거라는 거 알아. 그 무인도 이후로도 몇 달을 우리는 변한 게 없었으니까. 또 아예 변한 게 없냐면 그것도 아니지만. 사실 어제 이상한 꿈을 꿨어. 밤새 자다 깨다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여튼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공연 앞두고 있어서 그런가. 근데 네가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자다가 일어나서 아 형원이한테 얘기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했어. 근데 오늘 아침에 네가 날 보자마자 뭐라고 했냐면 무서운 꿈을 꿨다는 거야. 밤새 악당들한테 쫓겨 다녔는데 내가 나왔대. 내 어깨를 붙잡고 갑자기 슝 하고 달려갔다나 뭐 잘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꿈이라는 게 그렇잖아. 얘기할수록 어라? 싶은 내용의 연속인 거. 근데 네가 그랬잖아.

‘형 없었으면 진짜 다 포기하고 그냥 악당들한테 잡히려고 했거든? 근데 형이 자꾸 앞서서 막 주먹을 뻗는 거야. 어떻게 해. 같이 싸워야지. 아 진짜 무서웠는데.’

 웃기게도 그 이야기를 듣는데 오늘 너한테 그때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 저렇게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걸 열심히 나한테 얘기하는 그 퉁퉁 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싶었거든, 문득.

 아, 형원아 눈 그만 크게 떠. 난 가끔 네 눈 쏟아질 거 같아서 무서워 진짜. 무서워서 그래. 나는 악당 나오는 꿈보다 네 눈 쏟아지는 게 훨씬 무서우니까. 그래. 일단 진정 좀 해봐. 그래서 이 긴 이야기의 요지는 말이야. 어어? 아니 잠깐만. 얘기 좀 들어. 아 진짜. 아니 다 왔다니까. 좀만 더 들어봐. 왜 입술부터 부딪히는 거야. 잠깐만. 참아봐. 진짜.

 그러니까 내 말은
 에둘러 빙빙 돌려 구조신호만 보내는 건 그만하고 싶다는 거야.


 백 개의 우주 중 한 개의 우주에서는 헤어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영원히 평행의 세계에 슬픔만이 떠다니는 건 싫어. 무인도가 아니어도 네가 필요해. 항상 그랬어. 너도 그렇잖아. 네가 유난히 붉은 석양을 보며 세상의 끝을 생각하기보다는, 돌아갈 곳을 떠올리기 바라. 그 돌아갈 곳이 항상 나였으면 좋겠어. 더 이상 목적지 없이 헤매지 않고 싶다는 얘기야. 너도, 나도. 서로의 목적지가 되어주자. 목적지도, 도착 예정 시간도 분명한 게 좋아 나는. 그러니까,


 다시 만나자, 우리.

 그러자, 형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