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to-day

럭키

1.

"형원아."

 현우의 부름에 앞서 걷고 있던 형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냐는 듯한 표정이 제법 뻔뻔하다. 형원과 마주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뻗어 꽉 찬 카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현우가 카트 맨 밑에 깔려있는 과자를 꺼내 보란 듯이 들어 보였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 현우가 말없이 과자를 건네자 어깨가 추욱 쳐진 형원이 과자를 받아 들고 과자 코너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 처량한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맘이 약해지려 했지만 마음을 굳게 다잡아야 했다. 요 근래 현우의 잦은 야근 때문에 가끔 저녁을 같이 먹지 못하게 되면 날이 더워 입맛이 없다며 자꾸만 밥 대신 과자를 까먹는 탓에 형원에게 군것질 쇼핑 금지령을 내린 것이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오늘도 마트에 오자마자 슬쩍 과자 한 아름 껴안고 온 걸 돌려보냈더니 기어코 박스 모양의 작은 과자 하나를 남겨와서 현우가 쇼핑 리스트를 확인하는 동안 몰래 카트에 집어넣은 걸 딱 들킨 것이었다. 이번엔 정말 과자를 두고 온 것인지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형원의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와 있어 현우는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아야 했다.

 쇼핑을 마치고 계산대로 향해서 열심히 카트에서 계산대로 물건을 옮기는 형원의 불만 가득한 볼을 힐끔 본 현우가 계산대 앞에 묶음으로 할인 판매되고 있는 과자세트를 집어 슬쩍 계산대에 올려두었다. 계산대에 올려진 과자를 발견하자마자 말랑한 볼이 쭈욱 밀려 올라가는 것을 보며 현우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2.

 큰일 났다. 형원의 머릿속에 그 단어만이 들어찼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리모컨 전원 버튼을 열심히 꾹꾹 눌러보았으나 에어컨은 여전히 작동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어컨이 고장 났다. 그것도 한여름에….

"뭐???"

 산책을 다녀오며 양손 가득 아이스크림을 사 온 현우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들은 절망적인 소식에 눈을 질끈 감았다. 형원이 아이스크림이 잔뜩 들어있는 봉투를 건네받으며 에어컨 수리기사님에게 전화를 돌려 예약을 잡았으나 다음 주에나 오실 수 있다고 하셨다는 얘기까지 시무룩하게 전해주자 현우가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씻고 나오자마자 곧장 창고방으로 들어간 현우가 꺼내온 것은 창고방에서도 제일 깊숙이 들어가 있던 먼지가 가득 쌓인 선풍기였다. 오, 대박! 완전 까먹고 있었는데! 형원이 감탄하자 현우가 뿌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열심히 분해하고, 청소하고, 다시 조립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버튼을 눌렀으나 돌아온 결과는 덜덜덜 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였다. …엥? 형원과 현우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얘 원래 고장 났었나?"
"씁, 아닌데…. 멀쩡하지 않았어요?"

 그 순간 현우가 손을 들어 선풍기를 두어 번 퍽퍽 때리자 이젠 선풍기가 털털털 이상한 소리까지 내면서 돌아갔으나, 동시에 바람 세기가 강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잠시 얼타던 형원이 상황 파악이 끝나자 터져 나온 웃음과 동시에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때리면 티비처럼 고쳐질 줄 알았다며 머쓱하게 붙여진 뒷말에 겨우 웃음이 사그라들었던 형원은 다시 한번 배를 부여잡아야 했다. 어쨌든 바람이 세졌으니 된 거 아니냐는 현우의 말에 형원이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채로 맞다는 듯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3.

 친구로 지낸 기간 4년. 연애 기간은 6년. 알고 지낸 지 자그마치 10년이었다. 심지어 연애 기간 6년 중 절반은 동거까지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싸우게 됐다. 그것도 누가 더 좋아하냐는 유치한 주제로. 처음엔 장난이었고, 중간엔 가벼운 투닥거림이었으나, 끝에 가선 진지한 표정과 진지한 목소리로 아니, 제가 더 좋아한다니까요?! 따위의 말을 내뱉던 자신을 떠올린 형원이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헤집었다.

 어쩌다 보니 진지해졌지만 싸운 주제가 주제인 만큼 싸웠다고 표현하기도 애매해서 금방 풀릴 줄 알았으나, 이 주제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기가 민망해 어영부영 미루다 보니 어색하게 지내는 기간이 길어져 버렸다.

"…이건 아니야."

 근무 중에 열심히 타자를 치던 형원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그러나 답도 안 나왔다. 누구에게 고민 상담을 할 수도 없었다.

'내가 형이랑 처음으로 싸웠는데.'
'뭐 땜에?'
'누가 더 좋아하는지 얘기하다가….'

 까지 상상했다가 형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꺼냈다간 밥을 안 먹어도 될 정도로 욕을 얻어먹을게 분명했다. 하아…. 절로 깊은 한숨이 샜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가자 보인 광경은 자신을 기다린 듯 앉아있던 현우와 식탁에 올려진 포장된 족발, 그리고 소주 5병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형원이 후딱 간단하게 씻고 나와 옷까지 갈아입고 식탁에 마주 앉았으나 여전히 정적이 흘렀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만 있던 둘은 현우가 소주를 들고 뚜껑을 따자 반사적으로 잔을 든 형원을 시작으로 내리 술만 들이켰다.

 이 주제에 대해 얘기를 꺼내려면 도저히 맨 정신으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은 둘 모두 동일했던 탓에 형원과 현우는 빠르게 취해갔고, 결국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부둥켜 껴안은 채 내가 더 좋아한다고 화내서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웃긴 광경이 연출되었다.

"우리 둘이 똑같이 좋아하는 걸로 하좌…."
"웅 조아요…."

 누가 들어도 바보들의 대화였다.


4.

"형 아이스크림 뭐 먹을래요?"
"나 시원한 거 아무거나."

 …아이스크림은 다 시원하지 않나.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빠르게 지워낸 형원이 한 손엔 소다맛 아이스크림, 한 손엔 콘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었다. 소파에 나른하게 늘어져 티비를 보던 형원의 자세가 계속 무너지더니 곧 현우의 어깨에 머리가 툭 닿았다. 자연스럽게 마주친 시선에 현우가 고개를 내려 가볍게 쪽 입을 맞추었다.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맞닿은 입술이 차가워 킥킥대던 둘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몇 번 더 쪽쪽대다 어느 순간 혀가 서로의 입안으로 넘어 들었다. 질척한 소리는 곧 젖은 소리와 함께 떨어진 입술에 의해 끝이 났다.

"어우, 맛 섞였다."

 입이 떨어지자마자 입맛을 쨥쨥 두어 번 다신 현우가 뱉어낸 말에 형원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결국 현우는 이날 자기 전까지도 형원을 달래야만 했다.


5.

 형원은 주말엔 항상 점심때까지 늦잠을 잤다. 현우도 늦잠을 자긴 했으나 점심이 되기 전에 일어나 부지런하게 산책이나 운동을 다녀왔는데, 때문에 늦잠을 자는 형원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현우는 가끔 먼저 일어나서 자는 형원의 얼굴을 종종 구경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얘는 자는 것도 예쁘네 싶어서.

 가만히 지켜만 보다가 머리를 쓰다듬어보기도 하고, 말랑한 볼도 몇 번 찌르다가, 자느라 평소보다 더 부어 커진 입술을 집어 보기도 했다. 그동안은 형원이 깬 적이 한 번도 없었으나 오늘은 어쩐 일인지 볼을 콕콕 찌르는 느낌에 반쯤 잠에서 깼다. 그렇지만 피곤해서 금방이라도 다시 잠에 드려는 찰나, 다시금 얼굴에 닿는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간질간질한 손길에 결국 형원이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어, 깼어? 나 땜에?"

 현우가 작게 미안하다고 덧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의 손길 때문에 깬 게 맞긴 했으나 오히려 좋아서 형원이 몸을 일으켜 현우의 몸 위로 쓰러지듯 누워 현우를 껴안았다. 자연스럽게 등 뒤로 둘러진 손이 토닥거리는 게 느껴지자 형원이 다시 한번 간질거림을 못 참고 웃음을 터트렸다.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고 보송한 이불에 파묻혀 현우를 품 안 가득 껴안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형원의 웃음이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런 형원을 다정하게 쳐다보는 현우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참을 뒹굴거리다 시간을 확인한 현우가 몸을 일으켰다.

"운동 가려구요?"
"어엉. 넌 더 잘 거야?"
"우웅, 다녀와서 맛있는 거 먹어요."
"응, 잘 자."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아래로 흘러내린 이불을 주워 형원의 몸 위로 덮어준 현우가 방 밖으로 나갔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형원이 눈을 감았다.

 시간이 좀 흘렀으나 바로 잠들지 못하고 반쯤 수면에 빠져있던 그때,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는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형원이 다시 잠든 줄 알고 평소처럼 상체를 숙여 볼에 가볍게 뽀뽀한 현우가 다녀올게 속삭이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이불속에서 하얗고 마른 손이 튀어나와 현우의 얇은 손목을 붙잡았다.

"뭐야, 너 안 잤어?"
"형 맨날 나한테 뽀뽀하고 나갔어요?"

 형원의 물음에 현우가 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을 못하는 귀가 순식간에 빨개지는 것이 보였다. 형원이 힘을 줘 잡고 있던 손목을 그대로 끌어당기자 방심하고 있던 현우의 몸이 순식간에 형원의 위로 쓰러졌다. 형 오늘 운동 못 가요. 그렇게 말하며 사르르 웃는 형원의 얼굴이 창밖의 햇살보다도 밝았다.


6.

 여름맞이 대청소의 날이었다. 그동안 바쁘단 핑계로 미루고 미뤄왔던 터라 주말이 되자마자 잠에 취해 칭얼거리는 형원을 어르고 달래 깨운 현우가 50L 쓰레기봉투를 꺼내 한 장을 형원에게 건네주었다. 잠에 빠진 형원을 깨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온 얼굴에 뽀뽀비를 내리는 것이어서, 아침부터 현우에게 만족할 만큼 뽀뽀를 받은 형원의 얼굴이 잔뜩 풀어져있어 현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샜다. 자, 이제 청소합시다. 현우의 말에 형원이 고분고분 창고방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티비 밑 서랍장에서 이젠 안 쓰는 물건들을 골라 쓰레기봉투에 넣고 있던 현우의 시야에 서랍 구석에 나뒹굴고 있던 필름 카메라가 들어왔다. 어, 이거….

"형원아! 일로 와봐봐!"

 현우의 외침에 창고방을 정리하고 있던 형원이 빼꼼 고개만 내밀었다가 현우의 손에 들려있는 필름 카메라를 발견하고 순식간에 눈이 커졌다. 손에 들고 있던 청소기를 내팽개치고 당장 달려온 형원이 필름 카메라를 받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헐. 형 이거 아직 몇 장 더 찍을 수 있는데요?"

 형원의 말에 의해 그날 청소는 그걸로 끝이 났다. 성인 남성 둘이 필름 카메라 하나로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한참을 꺄르르 대다 그렇게 오후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저녁을 먹고 궁금하다며 그날 바로 필름 카메라를 맡기러 다녀온 현우는 내일이면 바로 인화가 될 거라는 사장님의 말씀에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사진관을 다녀왔다.

"형원아, 형원아. 일어나 봐."
"으에…. 왜요 혀엉…."
"사진 인화된 거 찾아왔는데 빨리 봐봐. 진짜 대박이야."

 사진이란 말에 형원의 눈이 번쩍 뜨였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비켜 앉자 현우가 침대 위에 사진을 넓게 펼쳤다. 하나하나 천천히 눈에 담자 추억의 힘이 순식간에 형원과 현우를 그 시절로 돌려보냈다.

 둘이 아직 대학생이자, 친구이던 시절. 형원과 현우 그리고 동기인 지훈까지. 셋이서 여름방학 맞이 여행을 가기로 계획했었더랬다. 아직 돈 없는 학생 신분이라 경비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던 차에 갑자기 지훈이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가 차를 구해오겠다고 당당히 선언을 했다.

"너가?"
"렌트해온다는 거예요?"
"아니, 아니, 아는 분이 있어. 어쨌든 내가 알아서 구해올 테니까 대신 너네가 운전해!"

 아주 자신만만한 지훈의 태도에 정말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나 보다 싶어 기대감이 올라간 형원과 현우가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작 여행 당일. 아침부터 여행용 단톡방에 배탈이 너무 심해 화장실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것 같으니 너네 둘이 가라는 카톡이 올라왔다. 차는 학교 근처에 주차해 놨으니 알아서 찾아가란 말과 함께. 아침부터 날아온 김 빠지는 소리에 형원과 현우의 한풀 꺾일 뻔했던 기세는 그래도 여행이니까 즐겁게 가자며 좋게 좋게 달래는 말과 함께 되살아날 뻔했으나 그 지훈이 구해왔다는 차를 발견하자마자 완전히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구해온 건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아주 오래된 차였다. 정말 아주… 아주… 오래된. 차 외관만 보고도 기겁할 정도라 정녕 저걸 타고 가야 하나 싶었지만 자기만 믿으라며 큰소리를 뻥뻥 쳐댄 지훈 때문에 이쪽으론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있었던 터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한숨을 푹푹 쉬며 형원과 현우가 차에 올랐다. 자리에 앉고 나서도 창문을 내리는 방법이 버튼이 아닌 손잡이를 돌려 내려야 하는 것임을 발견하고 지금이라도 내릴까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현우가 현실을 받아들이며 안전벨트를 끌어당겼다. 슬쩍 돌아본 옆자리는 무교라고 알고 있는 형원이 이미 안전벨트를 맨 채 눈을 감고 손을 꼭 부여잡은 채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제발 살아 돌아오게 해 달라는 중얼거림을 들은 현우가 고개를 한 번 털어내고 차에 이미 꽂아져 있는 키로 시동을 걸자 차가 덜덜거리기 시작했다. 흡사 전동 의자에 앉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자 잠시 정적이 흐르던 차 안은 출발한다는 현우의 비장한 목소리에 의해 끊어졌다.

 안 그래도 더위를 많이 타는 현우는 긴장감까지 더해져 땀으로 샤워를 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에어컨을 틀어달라는 현우의 부탁에 조수석 위 손잡이를 꼬옥 붙잡고 있던 형원이 더듬더듬 에어컨 버튼을 찾아 헤매다 꾹 눌렀다. 다행히 에어컨은 정상 작동을 했는데, 문제는 에어컨이 켜지면서 동시에 차 속도가 느려진 것이었다. 형원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잇새로 새어 나오려는 욕설을 겨우 갈무리했다. 돌아가면 지훈을 죽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평지는 어찌어찌 굴러갔으나 문제는 오르막길이었다. 최대 속도로 밟아도 도저히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에어컨을 껐는데 그마저도 불안하자 결국 현우가 운전대를 형원에게 맡기고 차에서 내렸다. 남들이 보면 멀쩡한 차를 손으로 밀고 있는 시트콤 같은 일이 벌어졌다. 목적지에 다 와가서 구석진 곳이라 뒤에 차가 없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본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형원과 현우의 몰꼴이 꾀죄죄해졌다.

 사실 이맘때쯤 형원과 현우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막 썸을 타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은근히 아닌 척 머리까지 매만지고 옷도 신경 써 입고 왔으나 더위에 녹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백미러로 현우가 땀을 뻘뻘 흘리며 차를 밀고 있는 것을 확인한 형원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상이 되었다. 형원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지훈이 백 번도 넘게 다양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가며 도착한 목적지의 풍경은 두 사람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탁 트인 전경에 햇빛이 반사돼 반짝반짝 빛나는 여름바다가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는 동안 고생한 게 모두 잊혀질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게다가 위에 올라오니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와 땀에 젖은 두 사람의 이마를 식혀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여름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후론 그렇게 고생하며 온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모든 일이 순탄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는데 굉장한 맛집이었고 사장님이 잘생긴 청년들이 잘 먹는다며 서비스까지 푸짐하게 주신 덕분에 빵빵해진 배를 통통 두드리며 나와야 했다. 조금 어둑해진 날씨에 바닷가를 따라 산책을 하다가 시원한 바다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왕창 마신 소주의 열기가 조금 가라앉는 기분에 형원과 현우가 발을 나란히 담근 채로 서로를 바라보며 사르르 웃었다. 밤이 되어서는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스파클라로 소소하게 불꽃놀이도 했다. 이런 거 처음 해본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형원은 스파클라 끝에 불이 붙어 불꽃이 튀며 타닥타닥 타들어가자 어린아이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바닷가에 불꽃놀이의 작은 불빛에 의해 둘의 얼굴에 따뜻한 기운이 일렁였다. 그 작은 빛에 의존하며 눈을 마주친 둘이 이번에도 동시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남는 건 사진뿐이라며 필름 카메라를 챙겨 온 형원에 의해 기록되었었다. 침대에 펼쳐진 사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니 몇 년 전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라서 첨엔 마냥 신났던 두 사람은 어느새 추억에 잔뜩 젖어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던 여름바다를 배경으로 한 컷, 사장님의 서비스에 감동받은 현우의 얼굴이 한 컷, 그 모습을 보고 빵 터진 형원의 모습이 한 컷, 바다에 들어가 있는 발 두 쌍이 한 컷, 시원하다며 술에 취해 열이 오른 얼굴로 배시시 웃는 현우의 모습이 한 컷, 스파클라를 들고 글자를 쓰려고 애쓰고 있는 형원의 모습이 한 컷, 포즈 좀 취해보라는 말에 어쩔 줄을 몰라하다 결국 브이와 따봉을 든 현우의 모습이 한 컷. 이외에도 여러 장의 추억이 침대 위에 가득했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주로 형원이었어서 풍경 사진과 현우의 비중이 더 컸는데, 시선과 마음은 못 숨긴다고 현우를 찍은 사진에서 애정이 듬뿍 담겨있는 것이 도저히 모른척할 수가 없는 수준이라 추억에 잠겨 사진을 살펴보던 현우의 귀가 어느새 새빨개져있었다. 민망한지 큼큼 헛기침을 하는 현우에 큭큭대던 형원이 결국 참지 못하고 현우의 볼을 잡고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침실에 쪽쪽거리는 뽀뽀 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