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민트 아이스티 당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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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하교 시간이라 한참 더울 정오 시간은 훌쩍 지났는데도 정수리에 꽂히는 햇빛은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학교와 좀 떨어진 곳에 자리한 버스정류장은 몇 개 없는 노선도가 듬성듬성 적힌 안내 표지판 하나만 덜렁 세워져 있어 햇빛을 피할 공간도 없었다. 등 뒤로 땀방울 하나가 주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형원이 교복 상의를 펄럭일 때, 저 멀리 자박자박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 소리가 이쪽으로 오는 것이 들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걸음 소리에 형원이 슬쩍 옆을 쳐다봤다가 다시 앞으로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괜히 눈이 마주쳐 버스가 올 때까지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고 싶진 않았다. 형원이 고작 눈이 잠깐 마주치는 것도 피하는 이유는 몇 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형원은 옆 마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먼 거리에서 학교를 다녔다. 시골이라 학교가 그리 많지는 않은 탓이었다. 초등학교까진 걸어서 통학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학교를 다녔으나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형원은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해야만 했다. 마을에 돌아다니는 버스는 몇 대 없었고, 학교를 지나가는 노선을 가진 버스는 와중에 한대뿐이었다. 심지어 버스는 배차간격도 길어서 운이 좋아야 20분, 길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형원은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가지진 않았다. 부모님이 교통비를 주시면서 덩달아 용돈이 생겼고 -비록 누군가가 쓰던걸 물려받은 거지만- MP3도 생긴 덕분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취향의 노래를 듣는 것은 형원의 새 취미가 되었다. 형원이 사는 곳에서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는 사람은 형원밖에 없어서 형원은 중학교 3년 내내 이 버스정류장을 혼자 사용했다.


 고등학교 입학식은 학생 수도 그리 많지 않은 탓에 간단한 순서로 진행되어 12시가 되기도 전에 끝나서, 형원은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며 점심으로 뭘 먹으면 좋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제가 좋아하던 반찬을 어제 다 먹었는지, 아직 남았는지 따위를 떠올리며 걸어가던 형원은 안내 표지판 옆에 서 있는 인영을 보고 멈추어 섰다. 저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누군가가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아, 그냥 '나 말고도 이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는 사람이 생겼나 보다' 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으련만. 3년 내내 저 혼자였던 공간에 누군가가 서 있는 걸 보자 형원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어? 하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버렸고, 그 소리를 들은 상대방이 고개를 돌려서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1초, 2초, 3초. 눈이 마주쳤으나 입 벌린 채 멍하니 있는 형원에 상대는 별말 없이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고 형원은 그대로 차도로 뛰어들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눈이 마주친 시간은 고작 3초밖에 되지 않았지만, 형원에겐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던 탓에 버스가 올 때까지도 형원은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지 못했더랬다.


 그 일이 있던 게 입학식이었으니 한여름이 된 지금은 이미 몇 개월이나 지난 일이었으나 형원은 아직도 가끔 자려고 누웠다가 이 일이 생각나 이불을 뻥 뻥 차기도 했다. 이젠 버스정류장으로 다가오는 걸음 소리도, 옆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도 익숙해졌지만 말이다. 버스가 도착하고 늘 앉던 자리에 엉덩일 붙이면 상대방은 앞문 바로 옆에 있는 자리에 앉아 이미 앉아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처음 며칠은 하교 시간엔 전세 낸 것처럼 저밖에 타지 않는 버스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 신기해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기도 하고, 야외활동을 많이 하는지 까무잡잡한 피부가 다부진 그의 체격과 꽤 잘 어울린다 하는 감상도 했었지만 이젠 형원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노래나 들었다.


 그렇게 햇빛이 쨍쨍할 때도, 비가 올 때도, 낙엽이 흩날릴 때도, 눈이 올 때도 휑한 버스정류장에 길쭉한 인영 둘이 덩그러니 서 있는 그림은 1년간 계속되었고, 그쯤 되었으면 눈인사라도 할 법했으나 형원이 의식적으로 눈 맞춤을 피한 탓에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날까지도 둘은 앞만 쳐다보며 버스를 기다렸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봄방학도 지나 다시 개학 날. 학교 로비에 몇 학년 몇 반인지 크게 적혀있는 종이에서 제 이름을 찾은 형원은 느릿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에 갑자기 키가 훅 크는 바람에 작년 1년 내내 맨 뒷자리만 앉아야 했던 형원은 이번에도 뒷자리에 앉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뒷문으로 향했다. 뻑뻑한 나무 미닫이문이 제법 큰소리를 내며 열린 탓에 문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고개를 돌려 형원을 쳐다봤다. 이번엔 어? 하는 소리가 형원 혼자가 아닌 두 명이었다. 작년 1년 내내 같이 하교를 했던 그 아이가 앉아있었다. 이번에는 정확히 마주친 눈에 형원이 머쓱할 새도 없이 배시시 웃은 상대방이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서 형원도 따라 살짝 웃고는 인사를 건네며 옆자리의 의자를 꺼내 들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손현우였다. 난 손현우야. 처음 들어보는 그의 음성은 제법 훈훈하게 생긴 그의 외모와도 잘 어울렸다. 손현우…. 자기도 모르게 이름을 한 번 중얼거린 형원이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아, 하고는 그, 난, 채형원이야, 허둥지둥 자기소개를 했다. 채형원? 채형원. 형원이…. 상대방 쪽에게서도 몇 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이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려는 순간 잘 어울린다, 환하게 웃으며 하는 칭찬에 형원은 갑작스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왜 이러지. 여름도 아닌데 등 뒤로 땀이 한 방울 주륵 흘러내렸다.


 손현우와는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았다. 언젠가 티비를 보며 얼핏 들었던 소울메이트가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친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진작에 친해졌으면 좋았을걸,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맴돌았다. 형원은 제가 웃음이 많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였을 줄은 현우를 만나고서야 깨달았다. 딱히 웃기려고 하는 말이 아님에도 형원은 현우가 무슨 말만 하든 빵빵 터졌다. 현우가 아예 작정하고 이상한 목소리로 얘길 하면 형원은 쉬는 시간 10분 내내 배를 부여잡은 채 책상 위를 구르다 수업 시간이 시작되어도 웃음을 참지 못해 교실 밖으로 쫓겨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웃음을 참으려는 노력도 없이 크흐흑, 하는 소리를 내는 형원이 교실 밖으로 쫓겨나면 그 큰 몸을 숙여 웃음을 참느라 등을 들썩거리던 현우가 덩달아 같이 쫓겨나는 일도 이제는 반 아이들과 선생님 모두에게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복도로 쫓겨나면서도 둘은 뭐가 그리 좋은지 텅 빈 복도를 오로지 둘의 웃음소리로 꽉 채웠다.


 이제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도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버스가 오면 자연스럽게 2인석으로 걸음을 옮겨 그 큰 덩치들이 마을버스의 좁은 좌석에 어깨를 꾸겨 앉았다. 맞닿은 어깨에서 뜨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현우는 더위를 잘 탄다고 했다. 하복 혼용 기간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복을 입고 온 현우는 여름의 초입인데도 벌써 땀을 줄줄 흘렸다. 그럼에도 맞닿은 어깨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형원은 전혀 기분 나쁘지가 않았다. 덕분에 창가 자리는 항상 현우의 몫이 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긴 팔을 뻗어 창문을 열어주면 현우는 내가 해도 되는데, 하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며 눈을 접어 웃었다. 형원은 그 웃음이 제게 향하는 순간이 좋았다.


 언제부터였을까. 형원은 이게 언제부터 생긴 감정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노래를 듣는 것이 새로운 취미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지만 더위를 많이 타는 그 아이를 위해 창가 자리를 양보하면서도 그게 하나도 아쉽지가 않았을 때부터였을까. 이어폰을 한 짝씩 나눠 끼고 MP3로 노래를 듣다가도 슬쩍 돌아본 시선에 그 아이의 옆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졌을 때부터였을까. 언젠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그 아이의 까무잡잡한 피부에 자리 잡은 까만 점들을 발견하고 자려고 누웠을 때 그 작은 점들이 왜인지 자꾸만 떠올랐을 때부터였을까. 3년을 넘게 혼자 다니던 하굣길이었는데도 그 아이가 내일 보자며 먼저 내리면 텅 빈 옆자리가 허전해지면서 괜히 집 가는 길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을 때부터였을까. 선생님께 혼나 쫓겨나면서도 복도에 서서 괜스레 숨을 참고 있으면 곧 저와 똑같이 웃음을 터트리는 얼굴로 따라 나오는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면서부터였을까. 교실 뒷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익숙한 얼굴에 아는 척을 하고 인사를 건네주며 환하게 웃어주었던 순간부터였을까. 아니면 처음 보자마자 제 목소리에 돌아본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친 순간부터….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각에 형원이 벌떡 상체를 세워 앉았다가 다시 몸에 힘을 빼고 뒤로 확 누웠다. 언제부터 생긴 감정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형원은 밤에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이유가 더위가 아닌 여름을 닮은 그 아이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쿵쾅쿵쾅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형원의 귀 바로 옆에서 울리는듯했다. 밤마다 시끄럽게 굴던 창밖의 풀벌레 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어느새 천장에 아른거리는 그 아이의 얼굴에 형원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현우에게 생긴 이 감정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형원은 지금 제가 현우에게 갖는 감정의 이름은 알았다. 그러나 고백할 용기는 없었다. 형원은 벌써부터 제가 고백했다가 현우와 어색해지는 상상의 횟수가 백 번은 넘어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아 복잡한 작은 머리통이 요새는 과부하가 걸려 금방이라도 펑 터질 것 같았다. 요 며칠 제가 무슨 말만 해도 빵빵 터지던 형원이 제 말에 통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자 괜히 눈치를 보던 현우가 형원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눈을 맞추곤 어디 아프냐 물었을 때 형원은 너무 좋아서 그대로 얼어버리면서도 더더욱 고백을 못 하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주말 내내 끙끙대던 형원이 겨우 찾은 방법은 MP3에 고백 노래를 잔뜩 담아 가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며 비웃음이나 살 법한 방법이었지만, 형원은 요새 현우를 향한 마음이 끝도 없이 커져가 목 끝에 걸려 누가 툭 치기만 해도 튀어나올 정도라 어떻게든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으나, 말로 직접 전달했다가 현우와 어색해지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 그 사이에서 겨우 찾아낸 합의점이었다. 컴퓨터 사용이 익숙치 않아 독수리 타자로 하나하나 검색해 가며 MP3에 고백 노래를 잔뜩 담은 형원은 너무 떨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이 날 현우가 보기에 형원은 온종일 이상했다. 아침에 한숨도 못 잔 퀭한 얼굴로 등교한 것은 물론이고, 요 근래 계속 그랬으나 오늘따라 더 제 말에 집중을 못 했다. 수업 시간에조차 누가 봐도 머릿속이 딴생각으로 가득 찬 얼굴에 교과서를 읽어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어딘지 찾지를 못해 처음으로 웃음이 터져서가 아닌 이유로 교실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심지어 점심시간엔 입에 대지도 않던 초록초록한 반찬을 멍한 얼굴로 입에 집어넣다가 씹고 나서야 제가 방금 뭘 먹었는지를 깨닫고 웩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하교 시간이 다가와서는 시계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갑자기 몸을 뻣뻣하게 굳히다가도 그새 몸을 가만히 못 두고 다리를 덜덜 떨기도 하는 형원을 보며 얘가 왜 이러나 어디 아픈가 하루 종일 걱정하던 현우는 무슨 일 있냐 물을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요새 환하게 웃어주는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아랫입술이 튀어나오려는 걸 입술을 꾹 말아 물어 겨우 막았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면서는 조금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 형원은 고백도 아니고 고작 MP3에 담긴 고백 노래를 들려주는 거면서도 제 마음을 표현한다는 생각에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현우도 현우 나름대로 이 생각 저 생각에 머릿속이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버스가 도착하고 맨날 앉는 자리에 익숙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창가 자리에 현우가 앉도록 옆에 비켜선 형원이 현우가 앉자마자 자리에 앉기도 전에 손을 뻗어 창문을 열어주었다. 현우가 열린 창문 한 번, 이제야 옆에 앉은 형원을 한 번 쳐다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버스가 출발하고서도 정적 속에 나란히 앉아만 있던 둘은 형원이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며 MP3를 꺼내면서야 그 정적이 깨졌다. 큼, 그, 노래, …들을래? 이어폰 한쪽을 잡아 건네는 형원의 손이 이상하리만치 덜덜 떨고 있었다. 형원에게서 흘러나오는 묘한 기류에 현우가 고개만 끄덕인 채 이어폰을 건네받아 귀에 끼었다. 곧 흘러나오는 노래는 평소에 형원이 즐겨 듣던 팝송이 아닌 처음 듣는 노래였다. 그 다음 노래도. 그 다다음 노래도. 현우는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노래를 감상했다. 맞닿은 어깨가 뜨끈하다 못해 뜨거웠다. 형원은 현우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못해 맞닿은 어깨에 온 신경이 쏠린 것 같았다. 노래가 재생될수록 가방을 쥔 형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곧 현우가 내릴 차례였다. 현우가 손을 뻗어 하차 벨을 눌렀다. 형원은 입안이 바짝 말랐으면서도 긴장돼서 자꾸만 마른침을 삼켰다. 탁. 창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고 현우가 일어났다. 그제야 형원의 시선이 현우를 향했다. 귀에서 뺀 이어폰 한쪽을 내밀고 있었다. 내일 보자. 여전히 한쪽엔 사랑 고백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는데 이어폰을 끼지 않은 쪽으론 언제나와 같은 현우의 담백한 인사가 들렸다. 어어…. 형원이 현우에게 들렸을까 싶을 정도로 작게 대답하고 현우가 버스에서 내렸다.


 …난 뭘 기대한 거지. 형원이 순식간에 찾아오는 쪽팔림과 자괴감 그리고 실망감에 고개를 푹 숙이고 발끝만 쳐다보고 있는데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원이 고개를 들어 창문 쪽을 쳐다보자 현우가 입을 벙긋거리며 입 모양만으로 말을 거는 게 보였다. 형원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금방 미간을 좁혀 집중했다. 뭐라고 하는 거지. 나…. 나도….


나도 좋아해.


 현우의 입 모양을 해석한 순간 형원이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동시에 버스가 출발했다. 몸이 휘청거리자 다급하게 손잡이를 잡아챈 형원이 중심을 잡자마자 허겁지겁 뒷문 앞에 섰으나 기사님을 부르는 소리가 크게 나오지 못하고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채형원 너 등신이냐. 다시금 몰려오는 자괴감에 형원의 고개가 또 한 번 추욱 쳐졌다. 아, 이럴 때가 아니라. 고개를 번쩍 든 형원이 하차 벨을 눌렀다. 다음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은 멀었고 형원은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기사님…. 제발…. 빨리….


 버스가 서고 문이 열리자마자 형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달렸다. 한여름의 햇빛이 뜨거웠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젖 먹던 힘까지 힘차게 달리자 땀이 잘 나지 않는 형원도 온몸에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형원은 멈출 수 없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도, 휙휙 지나가는 초록빛의 나무들도, 이마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도 형원은 아무것도 보고 느낄 수가 없었다. 형원의 머릿속에 오직 하나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얼굴이 새빨개져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죽어라 달리자 저 멀리 형원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여전히 그 자리에 현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뛰어오는 형원을 보며 환하게 웃은 채로.


 현우의 앞에 몇 걸음 떨어져 멈춰 선 형원이 무릎을 짚고 헉헉댔다. 겨우 숨을 고르다 힘이 다 빠져 터덜터덜 걸어 현우의 앞에 선 형원이 스르륵 현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맞닿은 가슴으로 똑같이 쿵쿵쿵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현우는 뛰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호흡에 크게 숨을 몰아쉬던 형원이 침 한번 꼴깍 삼키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좋아해…. 진짜 진짜 좋아해….


 세차게 우는 매미 소리에 비해 거의 속삭이는듯한 형원의 목소리는 턱없이 작았으나 현우는 온 신경이 제 어깨에 기대 있는 형원에게 쏠려있어 못 들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아까부터 불타오르고 있던 현우의 귀가 더 붉게 물들었다. 형원의 귓가에도 웃음소리와 함께 나도 진짜 좋아한다는 소리가 속삭여졌다. 형원의 심장이 아직도 세차게 뛰었다. 현우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