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 자락

TOPE

“...으와, 진짜 덥다.”
“셔누 씨, 고생하셨어요. 형원 씨도 힘드셨죠? 여기 얼음물 좀 드세요.”
“어이쿠, 감사합니다! 다들 시원한거 챙겨 드시고 계시죠?”
“그럼요. 저희 스탭들도 지금 드리고 왔어요.”

 현우와 형원이 나란히 툇마루에 앉아 탄식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현우는 땀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런 현우에게 휴대용 선풍기를 내민 형원도 이마가 촉촉하게 젖은 채다. 막내 PD가 내민 언 생수 두 개 중 하나를 따서 그녀에게 도로 내민 형원이 새 것을 건네 받고 싱긋 웃었다. 감동한 듯 웃은 PD가 스탭들 사이로 사라지고 나서 반쯤 녹아가는 생수 병을 뺨에 댄 형원이 현우를 돌아 보았다.

“형, 고생 많았어요. 이제 하나만 더 찍으면 된대요.”
“어어, 그래. 덥긴 무진장 덥다. 진짜 한여름이네. 형원이 너까지 땀 날 정도면.”
“에이, 형.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땀 나죠.”

 개구지게 웃으며 대꾸하는 형원을 보던 현우의 입가에도 너털웃음이 맺혔다. 더워서 지칠 만도 한데 스탭도 살뜰히 챙기고 물 하나를 또 열어서 제게 건네는 형원이 기특했다. 분명 데뷔 초에는 손이 엄청 많이 가는 동생인 것 같았는데.
 매미가 수 십, 수 백 마리는 있는 것처럼 울음 소리가 귀를 때린다. 현우와 형원, 그리고 스탭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 전통가옥 주변에는 다른 집도 없이 크고 작은 나무만이 자라 있었다. 이전에 멤버 전원이 모여 예능 프로를 찍었던 것처럼, 유닛 활동 기념으로 두 사람이 시골의 빈 가정집을 빌려 이 곳에 이사왔다는 컨셉으로 약 열흘 간 느긋하게 쉬며 시간을 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현우가 단 번에 물을 반쯤 비우고 목에 걸려 있는 수건으로 땀을 훔쳤다. 움직이는 건 이미 한참 전에 멈췄는데도 아직도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이 찌는 듯한 날씨에 밥을 해 먹겠다며 장작을 패고 불을 때 가마솥 밥에 도전한 결과다.

“그래도 밥 되게 잘 됐더라.”
“그니까요. 진짜 너무 신기했다니까요? 밑에 그 누룽지도 진짜 맛있었구.”

 근처 사시는 어르신이 나눠주신 김장김치로 김치찌개까지 야무지게 끓여 식사를 하는 장면을 촬영했었다.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맛을 다셨다. 형원과 함께 장터에 나가 돼지 고기를 사고, 힘 쓰는 일이 필요한 집에 가서 일손을 돕고 양파나 쌀, 마늘 같은 식재료를 얻는 건 꽤 재밌고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이미 요리는 개인 컨텐츠로 몇 번이고 해 보아 자신감이 붙은 현우가 도맡아 했고, 쌀을 씻거나 상을 차리고 요리하는 현우의 곁에서 음식 맛을 보며 응원과 감탄을 하는 건 형원의 몫이었다.
 그런 형원이 맛있다고 하는 걸 보며 현우는 이래서 요리를 하나보다 생각했다. 맛있다는 말이 빈 말은 아니었는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먹던 형원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현우가 피식 웃었다.

 구름 하나 없는 쨍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형원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매니저와 PD가 다가와 저녁 촬영에 대해 설명했다. 형원과 현우가 자세를 바로 해 앉고 귀를 기울였다. 힐링과 휴식이 목적인 프로그램인 만큼 자세한 지시나 연출은 없었다. 제작진이 미리 양해를 구한 이웃집─이웃집이라고는 하지만 걸어서 15분은 가야 했다─에 가서 두 사람이 준비한 선물을 드리며 인사를 하고 수박과 식혜를 얻어와 먹는 게 전부였다.

“대신 시골에서 힐링하는 컨셉인 만큼,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보신다거나 SNS 하는 거, 음악을 듣는 건 안 나올 거예요.”
“아, 네네.”
“집 안에 카메라만 두고 저희 철수하고 나서도 이런 장면들은 안 들어갔으면 하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형원과 현우가 흔쾌히 대답하자 PD가 조금 놀란 듯 반문했다.

“근데 휴식 시간에 다들 휴대폰 하고 그러지 않으세요?”
“아 근데 뭐, 일이기도 하고. 쉴 때 오히려 휴대폰 잘 안 보려고 해서 괜찮을 것 같아요.”
“저두요.”

 현우가 먼저 대답하자 형원도 따라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PD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잘 부탁한다고 당부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30분 뒤에 촬영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막내PD의 우렁찬 목소리에 형원이 마루 위에 한쪽 발을 올려 편히 않고 씩 웃었다.

“수박이랑 식혜 진짜 맛있겠다. 그쵸?”
“응.”

 신났네. 현우가 웃음기 어린 눈으로 형원을 바라 보았다. 낯을 많이 가려 긴 촬영이라고 하면 하루 내내 붙어 있는 스탭들에게조차 말수가 적다는 소리를 듣는 형원이지만, 현우와 있을 때는 달랐다. 이전에 민혁이와 촬영할 때 수박 자르는 걸 봐뒀으니까 수박 써는 건 자기한테 맡겨 달라는 자신만만한 모습이 퍽 귀여웠다.
 한적한 시골이다보니 그만큼 벌레도 많아, 형원은 혼자 바빴다. 더위에 반쯤 지친 현우는 뒤로 기대어 앉아 그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쟤는 연예인 안 했으면 서운했을 얼굴을 하고, 하여간 하는 짓은 청국장같은 애야. 홀로 든 생각에 또 웃음이 새는 바람에 막 잡은 모기를 자랑하러 다가온 형원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형, 많이 더워요?”
“어어? 아니, 지금은 좀 나아. 왜?”
“아니 자꾸 혼자 웃는 게 더위 들렸나 싶어가지고요.”
“어쭈, 못하는 소리가 없어.”

 실없이 날아오는 형원의 농담에 현우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밀쳤다. 하지만 어릴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밀어도 쉬이 밀리지가 않는 게 확실히 그가 단단해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자꾸만 피실피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으니 형원이 현우의 어깨에 제 어깨를 부드럽게 붙였다.

“아 왜요. 무슨 생각 하는데.”
“...그냥.”

 딱히 냉정하게 말한 건 아니었지만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현우의 눈이 어쩐지 행복감에 젖어있는 것 같아, 형원이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



“안녕하세요, 어르신.”
“아이고- 총각들이 뭐 이렇게 듬직허고 이쁘게 생겼댜?”
“하하”
“아이구우, 감사합니다. 저기 이거, 저희 제작진 분들이 준비 해 주신 건데…”
“아이고, 뭣하러 이런 걸 가져와.”

 나이 지긋한 노인이 주름이 자글한 손으로 연신 현우의 손을 붙잡고 손등을 쓰다듬는다. 어르신들에게 유독 사랑받는 두 사람이었지만 도통 칭찬에 면역이 생기지 않는 현우가 어색하게 웃는 동안 형원이 묵직한 쇼핑백을 내밀었다. 뒤에서 카메라를 든 스탭들이 ‘아유, 자기가 준비했다고 하지…’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방송이라도 차마 거짓말은 하지 말자 주의의 형원이 작은 것을 또 하나 내민다. 제작진도 예상치 못한 것이라 작게 웅성거리는 말 소리가 들렸다.

“아 그리구 이거는 저희가 준비한 건데 별 건 아니지만 받아주세요. 건강에 좋은 거래요.”

 현우가 설명을 덧붙이자 감격한 얼굴을 한 어르신이 한 번 더 현우의 손을 토닥였다. 이후로는 덕담을 듣고, 수박과 식혜를 얻어 오는 것이 애초의 기획이었으나 현우가 먼저 뭐 해드릴 것이 없냐 물었다. 눈치 빠른 형원이 옆에서 거들었다.

“저희 힘 쎄요. 뭐 옮기거나 장작 패는거, 이런 거 저희 다 잘 하니까 시켜만 주세요.”

 마지 못 해 그럼 이것 좀 부탁할 수 있겠냐는 말에 두 사람은 부지런히 쌀자루를 옮기고 김치 냉장고 자리를 바꾸는 것까지 도왔다.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현우와 형원의 품에는 큼지막한 수박과 살얼음이 언 식혜가 들려 있었다. 형원이 잔뜩 신이 나서 식혜 병을 흔들었다.

“식혜 진짜 맛있을 것 같애. 이거 직접 만드신 거래요.”
“그러게. 이거 살얼음까지 얼어갖구 엄청 시원하겠다.”

 현우가 들뜬 형원을 보며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형원이 수박을 거의 껴안다시피 한 현우의 힘줄 돋은 팔을 만지며 농담을 던졌다. 어우 형, 수박이 막 엄청 무거운 가봐여? 형원의 말에 현우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수박을 들고 웨이트 스쿼트를 하는 척 하자 스탭들의 웃음소리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 걸어서 반쯤 돌아왔을 때, 현우가 콧잔등에 툭 떨어진 물방울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방금 전까지 쨍하니 맑았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우중충한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순식간에 공기 중에 습한 기운이 들어차고, 피부에 끈적하게 더위가 달라 붙는다.

“어.”

 현우의 짧은 감탄사가 끝나기 무섭게 엄청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왕좌왕하며 스탭들이 장비를 챙겼고 두 사람은 수박과 식혜를 끌어안은 채 집까지 달렸다.

“우왁! 비 온다!”
“뛰어, 뛰어!”
“꺄아악!”

 여봐란 듯이 빗줄기가 굵어졌다. 지면을 세차게 때리는 빗소리에 철벅이며 달리는 발걸음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모조리 삼켜진다. 현우가 달리며 옆을 흘끗 돌아 보았다. 비 오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형원이 걱정된 탓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손으로 머리를 가린 채 달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빗물이 흐르는 얼굴을 손으로 훑었다. 형원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갑작스럽게 둘만 남겨진 것 같은 이 상황이 그에게는 퍽 기분 좋게 다가왔다.

 집에 도착하자 남겨져 대기하고 있던 스탭 몇이 다가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우려와는 다르게 형원은 밝은 얼굴이었다. 촬영 중이고 다른 사람도 있으니 당연했다.

“어떻게 해. 감기 걸리시면 안되니까 얼른 씻으시구요. 촬영은 잠깐 접었다가 밤에 비 상황 봐서 다시 시작한다고 감독님께 연락 왔어요. 지금 촬영팀은 장비 때문에 바로 스탭 숙소로 갔다고 하더라구요.”
“다들 감기 걸리시면 안될 텐데… 저희는 걱정 마세요.”

 다행히 스탭 숙소는 돌아오는 길 한 중간에 있었다. 다른 피해가 없어야 할 텐데. 조금 젖은 수준이 아니라 바다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사람마냥 물이 줄줄 흐르는 몸으로 방에 들어갈 수가 없어 머뭇거리며 입구에서 스탭과 이야기를 나누던 현우가 오히려 기다리던 그들을 다독였다. 일단 다른 분들과 합류해서 저녁 계획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하니 쉬고 계시라는 말을 남기고 빗속을 내달리는 스탭을 보내고 난 뒤, 현우가 뒤를 돌아보니 형원이 어느 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있었다.

“현우 형. 먼저 얼른 들어가서 샤워해요. 감기 걸리겠다.”
“어어.”

 그러던 현우의 발치에, 수건이 깔려있었다. 시선을 드니 방 안 욕실까지 수건으로 길게 길이 이어져 있었다. 아직 물기를 닦지 못해 잔뜩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긴 형원을 바라보니 현우의 질문을 예상한 듯 형원이 씩 웃었다.

“어차피 이따가 청소 한 번 해야 되긴 하겠지만… 욕실 들어갈 때 미끄러울 것 같아서요. 얼른 들어가요, 형.”
“......”

 현우가 말없이 잠시 형원을 바라보다 돌아서서 손으로 얼굴을 훑었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작은 말 한마디만 남긴 채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도망치듯 욕실로 쏙 들어가 사라지는 그의 귓불이 내내 붉어 형원은 뒤늦게 후끈해지는 뒷덜미를 문질렀다. 그가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현우의 미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눈치채지 못할 형원이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아주 짧은 순간 현우의 스위치가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잠깐 그를 따라 욕실로 들어가려던 형원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촬영 중이었다. 가방에서 새 수건을 꺼내 대충 젖은 머리를 털어내고 바닥의 물기를 닦으며 형원은 욕실 앞을 정리하다 안에서 들린 소리에 몸을 굳혔다. 단 한 번, 짧게 들린 소리였지만 형원은 그게 어떤 소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후다닥 일어나 수건들을 모아 정리하며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간간히 자신의 뺨을 때렸다.

 평소라면 5분이면 끝났을 현우의 샤워는 유독 길었다. 그래봤자 15분 정도였지만 양 뺨이 발갛게 상기된 채로 나온 현우가 방 한가운데에 앉아 막 통화를 끝낸 형원의 뒤에 가 섰다. 인기척을 느낀 형원이 뒤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아, 감독님한테 전화왔는데요, 형. 비가 아무래도 아침까진 안그칠 것 같다고… 아침에 다시 연락 주신대요. 어차피 큰 방엔 캠 설치 끝내뒀었다고, 아마 그건 돌아갈 것 같긴 한데…”
“그래? 알았어. 암튼 너도 빨리 씻고 나와. 감기 오겠다.”
“응, 얼른 씻구 올테니까 우리 수박 먹어요.”

 씩 웃으며 형원이 수건과 옷가지를 챙겨 일어섰다. 욕실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현우가 제 자리에 쪼그려앉았다. 그걸 못 참고 흥분해버릴 줄이야. 스스로의 행동에 믿을 수가 없어 잠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있던 현우가 곧 머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미 지난 일에 붙잡혀 있는 성격은 못 되었기에 뒷정리를 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뭐야, 싹 치워놨네. 현우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영 손이 많이 가는 막내동생같은 줄만 알았는데.

 샤워를 하고 나와서도 땀이 날 것 같은 후끈함에 현우가 큰 방의 미닫이 문을 열었다. 연결된 대청마루 너머로는 아직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다행히 비로 인해 열기는 조금 사그라들어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빗소리는 요란했고, 오늘 하루 촬영은 그 비로 인해 난리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 오는 바깥을 잠시 바라보던 현우의 귓가에 애앵- 하고 날벌레 소리가 들렸다. 모기가 있으면 또 바빠질 형원을 상상하니 웃음이 난다. 사전에 분명 모기향이 있다고 들었던 것을 기억해 낸 현우가 모기향을 찾아 꺼낼 즈음, 형원이 욕실에서 나왔다.

“형, 뭐해요?”
“어어, 더워서 문 좀 열었는데 모기가 너무 많더라. 그래서 모기향 좀 켤려구.”

 현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찰칵, 작은 불이 깜빡였고 곧 익숙한 향이 퍼졌다. 형원이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며 웃었다.

“우와, 모기향 냄새 진짜 오랜만에 맡아봐요. 이제 진짜 뭔가 시골집 같네.”
“그러게.”

 현우가 웃으며 모기향이 꽂힌 양철 접시를 대청마루 한쪽에 밀어 두었다. 한 쪽에 놓인 낡은 선풍기의 전원 코드를 꽂고 방향을 조정하는 동안 형원은 수박을 썰어 접시에 담아 왔다. 분위기가 딱이라며 마루에서 먹자는 말에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대청마루 끝에 걸터 앉았다. 나란히 앉아 결코 잘 잘랐다고 할 수 없는, 삐뚤빼뚤한 모양의 수박을 쥐고 두 사람이 수박을 먹는 동안 주변은 온통 빗소리와 풀벌레 소리로 가득찼다.
 단 한 조각으로 끝나버린 형원이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읏차, 하고 누워 현우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렸다. 잠시 멈칫 한 현우가 웃으며 형원을 내려다 보았다.

‘어차피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겠지만 뒷모습만 찍힐 거고, 마이크도 안 차고 있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마지막 수박까지 전부 해치운 현우가 야무지게 흰 껍데기만 남은 수박접시를 한 쪽에 밀어두고 두 팔을 뒤로 뻗어 몸을 지탱했다. 형원은 그새 잠든 것인지 말도 없이 조용했다. 시선만 몰래 내려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현우의 눈빛이 따뜻하게 젖어든다.

“...좋네…”

 현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쏟아지는 빗소리, 처마 지붕에 부딪혀 땅 위로 튀거나 쏟아지는 물소리와 요란한 풀벌레 소리가 귓전을 가득 메운다. 불규칙적이지만 계속해 이어지는 비슷한 소리들이 뭉쳐 점점 멀어진다. 어느 순간, 시끄러워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던 소리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속에 잔잔한 숨소리가 하나.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잠들어있는 형원의 입가에도, 빗속 어딘가를 멀리 바라보는 현우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서렸다.




***



 다음 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개어 버린 하늘에 촬영은 바쁘게 재개되었다. 며칠 간의 촬영은 무사히 진행되었고, 짐을 챙겨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지냈던 집을 바라보는 현우의 곁에 선 형원이 그의 얼굴을 흘끔 보고 웃었다.

“형, 우리 나중에 이런 집 살까요?”

 현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무슨 이유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하지만 현우는 미련 없이 돌아서며 형원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나쁘지 않네. 너 맨날 벌레랑 전쟁하는거 구경하고 심심하진 않겠다.”
“에에이, 형. 그 때 되면 모기향 끝내주는 게 나오겠죠.”

 형원이 현우의 농에 장단을 맞추며 먼저 걷기 시작한 그의 곁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현우가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여름에 한 번 더 놀러 오자.”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