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하고 고요한

익명

  형원은 여름형 인간이었다. 여름이 끈적이고 습기에 숨이 막히더라도, 뼛속까지 시린 겨울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런 형원에게도 이번 여름은 꽤 버거웠다. 땀이 없는 편임에도 기껏해야 10분 정도 서 있었을 뿐인데 상의 안으로 물줄기 하나가 흐르는 감각이 선명했다. 형원은 무늬 없는 깨끗한 흰 반소매 티를 잡아 흔들었다. 딱히 시원하지도 않은 공기가 형원이 옷을 펄럭이는 속도에 맞춰 상의 안과 밖을 순환했다.

  푸른 잎을 넓게 키워낸 커다란 나무 아래 그늘을 피난처 삼아 서 있으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쨍하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형원은 얼추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째려보았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았다. 매미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얄밉게도 울음을 뚝 그친다. 노려보던 시선이 애매하게 흔들리다 결국에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목적을 잃은 시야를 어쩔 줄 모르다 결국 제 손목시계나 들여다본다. 형원은 시계를 찬 손목에도 땀이 맺혀있음을 여실히 느꼈다.



[도착했어?]

  화면 위에 뜬 고작 네 글자에, 형원은 차오르던 불쾌지수를 뒤로 하고 빙긋 웃어버렸다. 입술을 얇게 눌러 입꼬리를 늘리면, 말랑한 볼이 밀려 볼록 올라갔다. 연락에 대한 회신을 위해 몸을 움츠려 모으다가, 문득 휴대전화 너머로 일렁거리다 못해 지글거리는 도로를 발견하고 잠시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뜨거운 공기가 춤을 추며 위로 피워내는 아지랑이를 보고 있노라면, 형원의 속이 속절없이 함께 흔들렸다.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꺾이는 빛의 굴절은 커다랗고 무거운 물체를 던졌을 때 일어나는 물의 파장과 닮아있었다. 형원은 열기를 보고도 물결을 떠올린다. 그 수면 아래에는 언제나 손현우가 부드럽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소란하고 고요한
채형원x손현우





  형원이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 입학식이 끝나기 전부터 이미 학과 안팎으로 기가 막히게 잘생긴 신입생 하나가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신입생들의 증명사진과 이름을 나열해놓은 종이가 붙은 학과 사무실로 선배, 동기 할 것 없이 학생들이 몰렸다. 그 사이에는 검은색 볼 캡을 푹 눌러써서 앞을 보려면 고개를 위로 들고 다녀야 하는, 묵직한 상체에 비해 조금은 맹한 얼굴을 한 손현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키가 조금 큰 게 다행이었지. 모자를 고쳐 쓸 생각도 안 하고 고개만 쳐든 채 거리가 꽤 있는 종이를 뚫어져라 보느라 현우의 도톰한 입술이 톡 튀어나와 있었다.

  저화질을 뚫고도 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현우도 감탄했다. 오, 진짜 잘생겼다. 심지어 이름도 채형원이랜다. 무슨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예쁜 이름이었다. 현우의 동기들이 웃으며 현우의 옆구리를 툭 쳤다. 이 정도는 잘생겨야 니 입에서 잘생겼다는 소리가 나오는구나. 현우는 무리와 함께 학과 사무실을 빠져나오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뭐. 내가 언제.



  형원은 잘생긴 외모 탓인지 ─ 덕분인지 ─ 입학식부터 뜨거운 관심 속에 꾸역꾸역 적응해나가야 했다. 들어가는 모든 강의의 교수님들은 꼭 형원에게 한 번씩 말을 걸었고, 그럴 때마다 형원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괜히 민망한 마음에 주변을 살피곤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형원에게 친절했지만, 형원은 가끔씩 그들과 어울리기를 피했다. 학교 안에서 함께 다닐 사람은 딱 한두 명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니까, 신은 공평하다고 했던가. 형원은 제 겉모습이 물어다 오는 관심에 비해 너무나도 낯을 가리는 편이었다는 말이다.

  병아리같은 1학년을 배려하여 과 내에서 기본으로 짜준 시간표를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하고, 고등학교와는 비교도 안되게 넓어진 면적에 길을 몇 번이나 잃고, 가장 가파른 오르막 앞에서 벅찬 숨과 함께 억울하게 지각을 받아들이며 뜀박질을 멈추고, 처음 겪는 강의 사이에 빈 시간을 어찌 채워야 할 줄 몰라 건물 밖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따끈따끈한 신입생 채형원은 원하는 수의 동기들과 함께 내킬 때는 모임에 참여하기도 하고, 또 참여하지 않기도 했다. 대학 생활에 얼추 적응했다고 느낄 때 쯤에는 엠티 참가를 위한 신청서를 받았다.


  동기들은 물론이고 까마득한 소수의 화석들까지 모이는 엠티 현장에서 형원은 이 선배, 저 선배 할 것 없이 겨우 외모로 인한 유명세를 이유로 불려 다녀야 했다. 야아, 진짜 잘생겼네. 너 왜 여기로 왔냐. 저어기 연예인 해야 하는 거 아냐? 하하, 형원이 어색하게 귀 뒤를 긁적이며 웃었다. 형원을 둘러싼 선배들이 형원의 잔을 향해 술 병 주둥이를 내밀면 형원은 차마 다 머쓱해하지도 못한 채 얼른 잔을 들었다. 술을 받는 손이 떨릴 것 같아 힘을 꽉 주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저녁 시간에는 바비큐를 한다면서 펜션 1층 거실로 모두 모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형원은 펜션에 도착하자마자부터 게임을 하며 가볍게 맥주를 들이켜는 내내 보지 못했던 선배 하나를 그때 처음 보았다. 직접 마주한 것은 아니고, 시원한 거실에 앉아 또 다른 선배들의 질문 세례를 받고 있을 때였나. 거실 마당 쪽으로 난 통 베란다 너머 고기를 굽고 있는 넓은 등이 문득 눈에 걸렸다. 형원은 처음 보는 선배의 뒷모습에서 잠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잘 들리지도 않는 질문에 적당한 대답을 바보처럼 흘리면서 어깨 미쳤다, 따위의 생각이나 했다. 가끔 다른 선배들과 대화를 하며 보이는 옆 얼굴이 멀끔했다. 고기에 집중하는가 싶다가 또 웃으며 무어라 입을 뻐끔댄다. 온전히 대답하는 입장에서만 있던 형원이 처음으로 선배들에게 물어볼 것이 생겼다. 혹시 저기 밖에, 고기 굽고 계시는 분은….


“아, 현우? 왔네. 늦는다더니. 손현우, 2학년.”

  현우의 존재를 알아챈 선배들이 형원을 자리에 두고 일어나 그에게 하나 둘 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숨통이 조금 트였다. 시끌벅적한 엠티 현장에 꽤나 늦게 도착한, 목장갑을 낀 채 불 앞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2학년 손현우. 이상하게도 찰나의 현우가 형원의 기억에 은은하게 맴돌았다. 반쪽 겨우 보인 웃는 얼굴이 퍽 귀여웠던 것 같다.


  그런 현우를 다시 본 곳은 아주 의외의 곳이었다.

  경영학과 동기 정훈이 동아리 입부 신청서를 내러 같이 가 달라는 말에 반강제로 끌려간 체육대 건물 수영장에, 시원스럽게도 물살을 가르는 손현우가 있었다. 입을 벌린 채 멍해진 둥그런 얼굴로 물 위에서 아래로 첨벙 빠져드는 현우를 바라보던 형원은,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라는 동기를 여전히 둥그런 얼굴로 냅다 한 번 당겨 안아 등을 두드렸다.

  엠티 이후로 휘발되었던 그 은은한 기억이 손현우가 가르며 튀어 오르는 물방울 마냥 떠올랐다.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눠본 적 없으면서 일방적인 반가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은근하게 지어지는 미소를 숨기지도 못했다. 와, 어깨 미쳤네. 아, 처음 봤을 때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수영장의 끝과 끝을 빠르게 횡단하는 손현우. 손현우 선배.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이 한 레일씩 차지하여 각자의 속도를 자랑하고 있음에도, 형원의 시야에는 현우만으로 충분히 차고 넘쳤다. 공간은 물이 찰박이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는데, 현우의 헤엄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거두고 퍽 진중한 얼굴로 바라보게 되는, 대상을 향한 존중과 존경. 형원이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그 차분해지는 마음이 좋아서 현우에게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야, 채형원! 가자.”

  수영부 부장으로 예상되는 남자의 뒤를 쫓아 사라졌던 정훈이 돌아오며 형원을 불렀다. 집중이 이루어놓은 고요의 틈새로 제 이름이 끼어들자, 금세 크게도 메아리치는 주변 소음 탓에 형원이 화들짝 놀랐다. 곧이어 혹시 현우도 제 이름을 들었을까 얼른 입 앞에 제 검지를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목소리를 잔뜩 낮춘다. 쉿. 조용히 해…!


  강의를 들으며 생각해 보니 정훈을 타박한 사실이 조금 민망해졌다. 너무 오버했다. 정작 정훈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지만. 아니, 저 선배는 내 이름도 모를 텐데.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서 쏟아지는 관심을 피해 다니느라 습관이 된 것은 아닌가 싶었다. 연예인도 아닌데 연예인 병에는 걸린 것 같아서 형원은 그날 괜히 정훈에게 조금 친절히 굴었다. 뭐, 덕분에 현우를 다시 보게 되기도 했고.



  그날부로 형원은 공강마다 정훈을 핑계 삼아 체육대 건물에 출석했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수영하러 가고 싶다는 정훈의 말에 형원이 저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었다. 나, 나도. 다른 친구들이 의문을 표했다. 너는 왜? 너도 수영부 입부했던가? 정훈이 고개를 저으니 형원이 어설프게 올라간 손을 슬그머니 내리며 아무렇지 않은 체했다. 아니, 나는 가면 안 돼? 수영부 아니면 들어도 못 가? 친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무래도 그런 편이라며 고개를 끄덕여도, 형원은 기어코 정훈의 어깨를 붙들고 길을 갈랐다. 점심 맛있게 먹어라, 엉?

  적당히 얼버무리며 쫓아왔다. 형원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하나 욱여넣고, 제대로 수영복을 챙겨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꿋꿋이 사복을 입은 채 구석의 플라스틱 벤치에 앉아 있었다. 형원은 여전히 존재감을 뚜렷이도 드러내는 손현우를 구경하느라 옆에서 무어라 더드는 정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저 끝에서 형원이 앉아 있는 쪽으로 힘차게 헤엄치는 현우를 어느 날과 같이 미소 짓다가, 또 짐짓 진지한 얼굴로 보고있던 형원의 시야 안으로 순식간에 정훈이 끼어들었다.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동기의 살색이 눈앞을 채우자, 형원이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며 놀랐다. 어이 씨, 깜짝이야.


“허락받았는데, 대신 너 나중에 수영부 홍보하러 다닐 때 같이 돌아달래.”
“허락?”
“너 구경해도 되냐고 선배들한테 물어보고 오겠다고 했잖아. 싫으면 나가시고.”
“아, 왜 이래애. 알았어, 알았어.”

  정훈이 빈 레일을 찾아 맨발로 잘도 뛰어갔다. 문득 물에 들어가기 전의 손현우가 궁금했다. 자유를 찾은 시선은 생각과 동기화라도 된 듯 현우에게로 돌아갔다. 앉아있던 의자 위로 아예 발을 올리고 무릎을 모아 앉아, 내내 현우를 바라보았다. 수경을 쓴 현우가 잠깐 제 쪽을 본 것 같아 또 다시 무의식적으로 딴청을 피운다. 아, 나 또 이러네. 어차피 저 선배는 내 이름도….



“엇.”

  과사에 제출할 서류가 있던 형원은 뜨거운 온도에 삐질 나는 땀방울을 턱 끝에 매달고 정훈보다 늦게 체육대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안과 밖의 온도차 탓인지 뿌연 습기로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 수영장 문을 당기려던 찰나, 분명 퍽 무거웠던 통유리가 제가 준 힘에 비해 너무 쉽게 딸려오며 열렸다. 텅, 묵직한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급한 마음만큼 앞으로 나가있던 신발 끝에 걸렸다. 하마터면 정면으로 얼굴을 부딪힐 뻔했다.

“아이고, 괜찮아요?”
“아, 괜, 헉….”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바보같이 덜컥 숨만 들이킨 것은, 문 뒤 편에 서서 고개만 내밀고 형원과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이 손현우여서 그랬다. 축축이 젖은 머리를 다 말리지도 않은, 민소매를 입은 탓에 다 보이는 팔의 힘줄 위로 젖은 수건이나 하나 걸친 채의 손현우. 얼마나 있었는지 몰라도, 물을 잔뜩 먹어 그런지, 피부가 유독 반질반질 말랑해 보였다. 형원은 이 남자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해야 했다. 왜냐하면….

“경영학과.”

  고민이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현우가 웃으며 먼저 아는 체를 했다. 형원은 이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숨 쉬는 붕어라도 된 양 입만 뻐끔거렸다. 비유적인 의미로 발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형원은 그동안의 자신을 순식간에 돌아보았다. 하필이면 첫 대면이 형원의 쌓여가는 시간 속 익숙함에 속아 현우가 저를 모른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지금. 바로 지금.

  형원에게는 이미 벚꽃이 피고, 중간고사를 치르고, 또 벚꽃이 지고, 녹음이 무성해져 매미가 울기 시작하는 계절의 변화 속에 수영장을 방문하는 일이 하루의 루틴이 되어있었다. 그래, 말 그대로, 그렇게 되어있었다. 사실상 나도 수영부 홍보 부원으로 포함시켜야 맞는 것이 아닌가? 꼭 저가 정식 수영부원이라도 된 듯 대담해진 형원은 어느샌가부터 아싸리 현우가 휘어잡는 레일의 가장 가까운 자리를 잡아 앉고는 했다. 뻗어 오르는 팔이 내리쳐 가르는 물살을 보며 청량함과 통쾌함은 차치하고도 은근한 설렘과 황홀함 따위를 마음 깊숙한 곳에 한 단씩 쌓아 올리며 저도 모르게 간지러운 목덜미를 짧은 손톱으로 몇 번을 긁었는지. 아니, 여하튼 간에.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현우의 질문이 꼭 저를 아는 사람인 양구니 발이 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선배는 그동안 내가 수영부를 밥 먹듯이 쏘다니며 자신을 음침하게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까? 그다지 숨어있지도 않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형원은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다.

“아, 아닌데요.”

  현우의 눈썹이 한껏 의문을 품은 채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왔다. 그 타이밍에 맞게 형원의 목울대가 올라갔다가, 따라 내려온다. 형원은 말을 끝내자마자 후회했다.

“음? 맞는데…. 너 채형원 아니야?”
“마, 맞아요.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형원은 현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제 이름 석 자에, 안 그래도 벌어진 입을 더 낮게 떨구고는 결국 그의 말꼬리를 자르며 허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차라리 헉, 정도는 귀여운 수준에 속했다. 이미 자리가 없는 머릿속에 망했다는 세 글자가 틈새를 비집고 가득 차올랐다. 거짓말을 왜 해, 거짓말을. 형원은 제 뺨을 한 대 치고 싶었다.

  형원이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진정 수습을 위한 말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인사를 끝으로 형원은 현우의 표정도 보지 못하고 뒤를 돌아 도망쳤다.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연예인 병이 나았다. 확인을 채 하지 못한 현우의 표정이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형원은 이대로 현우 얼굴을 또 어떻게 보나 싶었다.


  긴 팔과 다리를 휘적이며 도망치는 형원의 뒷모습을 보며 현우가 고개를 조금 갸웃대었다. 젖은 머리끝으로 매달려있던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맞아요,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짝눈이 느리게 껌뻑이며 내내 잡고 있던 수영장의 묵직한 문을 놓았다. 똑똑한 휴대폰과 연동되어 있는 시계가 현우의 손목에서 진동했다. 동기들의 연락이었다. 어우, 지금 몇 시야. 지각이네.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축인 현우는 허전한 배를 매만지며 걸었다. 어차피 지각인데 밥이나 먹으러 갈까.

  털레털레 건물을 나서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었다. 눈을 찌르는 태양에 현우가 절로 손을 올려 눈 위로 그늘을 그린다. 손현우는 열이 많았다. 한겨울에도 꼭 반소매 티 위에 트레이닝 복 하나만 덜렁 껴입고 새벽 러닝도 잘만 다니던 그가, 여름에는 유독 바깥을 쏘다니지 않고 물 아래서 잠겨 지내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여름이구나. 수영장에 내리 몸을 담그고 있다가 이렇게 직격타로 자외선을 맞으면 늘 피부가 따끔거렸다. 선크림 가져온다는 것도 깜빡했네.

  천성이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을 기피하는 편이라, 현우의 머릿속은 얕고 시답잖은 생각들이 삽시간에 중심을 바꿔가느라 바빴다. 형원의 뒷모습이 자꾸만 그 중심을 스쳤다. 현우는 어차피 지각인 김에 사내답게 땡땡이를 치기로 하고 정한 식사 메뉴가 마음에 들었다. 그 좋아하는 돈가스를 먹으러 가파른 내리막을 가벼이 내려가면서 스치기만 하던 형원의 도망가는 뒷모습이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습, 아니. 왜 도망갔지, 왜 거짓말했지? 내가 걔한테 뭐 했나? 형원의 인상이라고는 온통 저의 상상으로 점철된 것들 뿐이라, 현우는 형원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알 길이 없었다.


  과사에서 처음 지면으로 마주한 형원의 얼굴을 보고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동기들과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얼굴 값하겠네. 엄청 까탈스러울 듯. 직접 입 밖으로 꺼낸 의견은 아니었으나 현우는 동기들의 옆에서 고개만 느리게 끄덕거렸다.

  무리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엠티 자리에서 형원의 실물을 보았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프린터 기기로 출력된 그 사진이 실물을 채 다 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치게 잘생긴 얼굴이라고 인지하고 있었으나 살아 숨 쉬는 형원을 보고 있노라면 감히 사진발을 잘 받지 못하는 외모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걸 공평하다고 해야 할지, 불공평 그 이상이라고 해야 할지. 현우는 사람의 시선을 쉽사리 홀리는 형원의 외모에 저도 모르게 흘긋거리며 형원을 구경했다. 다만, 다른 동기들처럼 귀찮은 오지랖을 더 얹어주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바라만 보았다.

  까탈스러울 줄 알았던 형원은 생각 외로 사람들의 등쌀에 엄청 쩔쩔맸다.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고, 묻는 대로 대답하고, 시키는 대로 따라 하고. 겨우 벗어난 후에 동기들 사이로 돌아가며 진이 다 빠진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 조금 졸린 듯한 개구리 캐릭터가 떠오르기도 했다. 생각보다 순한가 보네. 형원이 눈에 걸릴 때마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혼자 웃고 있었다. 엠티 이후로도 한 번씩 학과 건물의 수많은 학과 학부생들이 모여있을 강의실에서 형원이 카메라로 초점이라도 맞춰둔 듯 잘도 눈에 띄었다. 쟤 키가 꽤 크구나. 현우는 그때 처음으로 형원의 전신을 인식했다. 옆에서 보면 어떨까, 싶었다.

  상상 속에서 실제의 형원을 찾아가는 행위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자신의 예상과 맞는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았다. 유독 오래 보게 되는, 볼 것이 외모뿐 만은 아닌 뜨거운 감자 후배. 그래서 현우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뻔질나게 수영장에 들락거리는 형원을. 같은 학과 1학년 중 처음으로 저와 같은 동아리에 들어오게 된 정훈에게도 벌써 물어봤다. 형원이도 입부하는 거야? 정훈이 도리질을 치며 대답했다. 아뇨, 구경만 하고 싶대요. 현우는 통통한 입술에 힘을 주어 일자로 꾸욱 눌렀다. 아, 그러니까.

  아쉬웠던 것 같다.



  현우는 수업을 들으면서도 형원이 생각났다. 도저히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이어지지 않는 말을 더듬으며 외치고는 뒤로 돌아 도망치는 장면이 잊히지가 않았다. 깊이 생각하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현우의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찍혔다. 왜, 왜 그랬을까. 채형원은 왜?

  답지 않은 시간이 쌓이니 결국, 그렇게 약해지는 여름임에도, 현우는 자발적으로 수영장에서 벗어났다. 햇빛에 지져지는 팔이 따끔거렸다. 차가운 음료를 뽑아 익어가는 살 위에 올려도 잠깐이었다. 햇빛은 강했고, 현우는 높은 온도에 속절없이 땀으로 녹았다. 수건도 수통도 없는 손이 허전했다. 이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형원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꺼이 허전한 손을 앞뒤로 흔들어가며 걷는 현우의 걸음이 가벼웠다.


  흔치 않은 공강 시간의 현우 주변으로 동기들이 시끄럽게 모여들었다. 오늘 해 서쪽에서 떴는지 본 사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현우를 면전에 두고 고민도 없이 거수하는 친구들 사이가 유쾌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떠들썩함이 싫지 않았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현우를 보고 반가워했다. 오늘은 수영장 안 갔어? 경영 물개가 무슨 일이래.

  아는 사람이 원래 이렇게 많았었나. 현우는 세 발자국마다 만나는 안부 인사에 정신이 없었다. 다만, 형원만은 줄곧 마주치지 못했다. 마주한 채 서있는 녀석들은 분명 후배들 무리가 맞는데 그 사이에 톡 튀어나와 있어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현우는 대화가 잠깐 끊기고도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다시 한번 형원의 얼굴이 없는 것이 맞는지 확인했다. 붙임성 좋은 아이 하나가 웃으며 물었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으세요? 머쓱하게 웃는 현우는 원체 숨기는 것을 못했다.

  형원은 어디 있느냐 물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지 다들 입을 모아 대답했다. 형원이요? 정훈이랑 체육대 건물 갔을걸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구나.




  형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현우의 모습에 좌절했다. 제가 저지른 실례를 무릅쓰고 또 한 번 찾아간 수영장에는 손현우가 없었다. 형원은 검은 볼캡을 손에 구겨져라 쥐고, 현우가 유독 자주 사용하는 레일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있었다. 그런 짓을 하고도 또 보러 가고 싶냐. 스스로를 타박한다. 양심이 없어. 죽은 양심을 밀치고 욕망이 앞섰다. 그 욕망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냥 어깨가 미친 같은 학과 선배가 수영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다는 것이 또 억울했다. 형원은 평소보다 일찍 몸을 일으켰다. 현우가 없으니 이곳은 그냥 축축하고, 천장에서 벤치 쪽으로 내려오는 에어컨 바람에 조금 춥고, 대화하는 소리, 물이 퍼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만 하는 곳이어서,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형원이 대충 일어나 별것 없는 짐을 챙기니, 어떻게 알고 정훈이 물 밖으로 나와 형원을 불렀다. 가려고? 형원이 정훈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응, 오늘은 영 볼 게 없다. 금세 형원의 코앞까지 다가온 정훈이 젖은 팔꿈치로 형원을 쿡 찔렀다. 아, 미친. 물도 안 닦고, 어? 으름장을 가벼이 무시한 정훈은 목소리를 낮추어 형원에게 속삭였다. 저기, 저 누나 존나 예쁘지 않냐? 정훈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바라보지도 않은 형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채형원, 너 저 누나 보러 맨날 온 거 아니야? 형원은 정훈의 어깨를 툭 밀쳤다. 야, 헛소리할 거면 빨리 물에나 빠져.


  안 그래도 보고 잡은 사람 못 봐서 짜증이 나고 있는데 쓸데없는 소리 나 해대는 동기 탓에, 괜시리 간지러운 것 같은 귓구멍을 둥그런 새끼손가락으로 조금 문대며 체육대 건물을 빠져나왔다. 보기 좋게 정돈된 나무 아래 낮은 돌담 위로 아무렇게나 앉아 뜨거운 햇빛 사이로 살랑 부는 더운 바람에 형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건조되지 않는 눅눅한 바람이었다. 그럼에도 물속에 내리 잠겨있던 현우 선배는 이 바람으로 건조되겠지. 형원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버리는 것을 참으려 입술에 힘을 주었다. 입꼬리를 억지로 붙들고 있으니 평소 웃을 때 볼록 올라가는 광대 대신, 입술 양옆의 볼살이 살짝 밀렸다. 손현우를 생각하며 웃음 짓고 있다는 자신을 알아채지도 못하는 이 둔하고 순한 채형원은 문득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이 둔하고 순한 형원의 귓가에 문득 정훈이 했던 말이 다시금 메아리친다. 너 저 누나 보러 맨날 온 거 아니야? 형원의 입꼬리가 느리게 내려갔다. 아니, 아닌데. 까만 포장도로 언덕의 정중앙이 열기에 들끓어 오르며 형원의 시야에 거슬렸다. 나는 그냥 현우 선배를 보려고 맨날…. 아물아물 흔들리는 공기 너머로 누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어, 찾았다.”

  좌우로 자잘하게 흔들리던 실체에 겨우 초점이 맞았다. 동시에 살풋 웃음 짓는 짝눈과 정확하게 시선이 마주친 형원이 입을 떡 벌렸다. 허어, 미쳤어.

“형원아. 커피숍 좋아하니?”
미쳤어, 채형원.



  어쩌다 보니 둘이 카페에 앉아 커피나 홀짝이고 있다. 처음 마주친 날에도 현우가 먼저 아는 체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손까지 흔들어가며 제 이름을 부른 탓에, 형원은 혼자서 채 다 혼란스러워하지도 못하고 얼렁뚱땅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정면으로 샐쭉 웃는 현우의 얼굴을 보는 것은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언제나 수면 위와 아래를 빠끔대는, 가끔은 풀 밖으로 한 번에 올라와 수경을 익숙하게 벗어내는, 멍한 듯 냉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만 보아왔다. 웃는 얼굴은 엠티 날에 보았던 겨우 그 반쪽도 채 보이지 않았던 옆모습. 그것이 다였다.

  직면한 마음탓일까, 눈앞에서 웃는 현우의 얼굴은 맹세컨대 엠티 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순하고 사랑스러웠다. 과장 없이 온 악력을 다해 심장을 꽉 쥐고 싶을 정도로 간질거리다가, 다시금 떠오르는 지난날의 과오에 그대로 심장을 터트려서 딱 죽고 싶었다. 형원은 깨닫기 시작한 마음에 도장을 찍기도 전부터 설렘과 쪽팔림의 갈피에 서서 울고만 싶었다.

  얼음이 폭 잠긴 까만 물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몰랐다. 형원은 차가운 유리컵 바깥에 송골송골 맺히는 물방울이 뚝뚝 흐르는 모습만 노려보고 있었다. 현우는 그 모습이 꼭 짐승 앞에 바들바들 떠는 초식동물, … 아니, 양서류 그 언저리로 보여 조금 미안해졌다. 현우가 한 입에 컵의 반절이나 되는 커피를 들이켰다. 그리고 내내 컵만 보다 돌아갈 것 같은 형원의 앞으로 손을 뻗어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흩어!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놀라는 형원이 웃겼다. 현우가 드물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하.

“형원아.”
“어, 느에. 예?”
“혹시 나 불편한가?”
“으아니요?”

  그니까, 불편하면 당신이 나를 불편해하는 게 맞지 않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할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형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말랑한 볼살이 작게 흔들렸다. 현우는 허허 털털한 웃음으로 그러니, 다행이다,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형원은 어쩔 줄 몰라 마른 세수만 했다. 현우가 그런 오해를 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형원은 뛰어나지 못한 말주변으로 온 손발을 다 써가며 해명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그때, 제가 거짓말한 것 때문에 선배가 혹시 저 불편하실까 봐. 저 사실은 그냥 정훈이가, 그러니까 제 동기가 수영부거든요. 정훈이 아시죠….

  생각나는 핑계라고는 하나 있는 수영부 동기, 정훈뿐이어서 주저하지도 않고 냅다 그 이름을 팔았다. 차마 선배가 수영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보기만 하려고 했다는 말은 못 했다. 구차해 보이기도 하고, 한다 한들 괜찮다고 말하는 현우의 얼굴에 이어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 웃으며 그대로 일어나 나가버리는 현우가 자꾸만 그려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전달하지 못하는 형원의 내향적인 면모도 한몫했겠지만.

  항상 수영장 끝에 발을 디딘 반동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나아가던 현우는 물 밖에서는 퍽 느렸다. 천천히 말하고, 천천히 움직이고, 천천히 웃었다. 그럼에도 이 선배는 대화하는 것마저도 꼭 수영을 하는 사람 같았다. 형원이 뚝딱거리면서도 나누는 이야기가 물 흐르듯 잘도 흐른 것은 아마도 긴장감에 아무렇게나 던진 대화 화제에 기꺼이 어울려주는 현우 덕이었을 것이다. 낯을 가리는 형원의 벽을 순식간에 허물어 웃음소리가 조금씩 메꿔지는 두 사람의 공간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 고요 속에서 쿵쿵거리는 제 심장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아 형원은 현우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도 자주 얇은 티셔츠를 잡아 털었다.

  다행히도 둘은 꽤나 대화가 잘 통했다. 공통이 되는 주제가 학과 강의, 교수님, 수영부 김정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원통하긴 했지만. 형원은 돌아가는 길에 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뒤로 걷는 현우가 꿈같았다. 형원이 반사적으로 현우를 따라 손을 들었다가, 어쩐지 예의 없어 보이는 것 같아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손을 먼저 내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이상한 자세가 되었다. 현우는 손을 주머니에 꽂고 웃다가 뒤를 돌았다. 형원은 커다란 양손으로 작은 제 얼굴을 다 가렸다. 햇빛 탓인가 가린 얼굴이 뜨끈 거렸다. 어유, 아휴.




[ 선배, 커피 사갈까요? ]

  메신저에 답장을 하지 못한 현우는 수영을 마치고 조금 급한 마음으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뒤에서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부원들의 대화에 어쩐지 귀를 기울였다. 직접적으로 대화 주제 대상의 이름을 듣지는 못했으나, 가만히 들어보니 아무래도 형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형원과 제법 가까워져 시시콜콜한 일상 대화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부원들의 중심에 서있는 정훈이 주도하는 이야기라는 점과, 머릿속을 뒤적일 때마다 알맞게 튀어나오는 형원의 이야기들로 미루어보아 정황상 형원이 이야기가 확실했다. 상의에 머리를 끼워 넣으면서 형원의 연락에 답장하고 대화에 끼어들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정훈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걔 분명히 나 좋아하는 거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수영부 쫓아오는 이유가 없잖아.”

  현우는 머리를 쇠망치로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형원도 그렇게 이야기했었던 것 같다. 저 사실은 그냥 정훈이가, 그러니까 제 동기가 수영부거든요. 정훈이 아시죠….수영부에 밥 먹듯이 찾아온 이유는 적당히 까불고 적당히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는 동기 하나였다고. 현우는 광배에 걸린 상의를 끌어내리며 맥없이 손을 떨구었다. 적은 힘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끼어들 말이 없어졌다. 현우는 그대로 부원들에게 인사도 남기지 않고 탈의실을 벗어났다.


  하긴, 제가 너무 들떴다. 현우는 뜨거운 햇빛에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바닥이 지글거린다.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아스팔트 너머에 형원이 보였다. 형원이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현우 혀엉! 더운 날에 잘도 뛴다. 긴 팔과 다리를 휘적이며 금세 현우 앞에 선 형원을, 오르막의 기울기 탓에 내려다보면서 현우는 가슴께가 저릿한 감각을 눈치챘다.

“정훈이 보러 왔니.”
“어! 어떻게 알았어요?”

  예쁘게도 웃는 형원을 보며 할 수 있는 대답은 한정적이었다. 아아, 그래. 현우는 달려오느라 흐트러진 형원의 앞머리를 보면서 습관처럼 손을 뻗어 정리를 해주려다 멈췄다.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던 현우가 슬 웃으며 어깨를 한번 으쓱인다. 그럼, 잘 보고 가. 형원을 지나치는 걸음에 현우의 머리가 형원보다 낮아진다. 고개를 돌린 형원이 급하게 제 가방을 뒤적이며 말을 덧붙였다. 혀, 형. 오늘은 일찍 가시네요…! 현우는 들어 놓고 못 들은 체했다. 오늘도 강의에 늦었다.

  아차, 형원이 문자에 답장을 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현우는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가면서 휴대폰 액정을 두 번 터치했다. 선배, 커피 사갈까요? 현우는 잠시 액정 위에 놓인 엄지손가락에 힘을 꾹 주었다. 답장을 좀 빨리할걸. 그랬다면 다시 돌아올 형원의 답장에 못 이기는 척 또다시 답장을 했을 텐데. 이미 마주친 얼굴에 이제 와 무어라 대답할지도 몰라서, 현우는 그대로 휴대폰 화면을 까무룩 꺼트렸다. 현우는 눈앞에 보란 듯이 일렁이는 아지랑이 위를 턱 밟고 걸었다. 이미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위로 형원이 한 번 더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형원은 가방에서 다 꺼내지도 못한 이온음료를 도로 넣으며 눈을 껌뻑였다. 답장이 없어서 커피 대신 자주 마시는 이온음료를 사 왔는데. 타이밍이 안 좋았다고 생각했다. 깔끔하게 정리한 목덜미를 긁적이던 형원은 느긋하게 높은 체육대 건물을 한번 쳐다보았다가, 현우가 내려간 길을 따라 내려갔다. 손현우가 없으니 들어갈 이유도 없었다.

  혼자 아쉬울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형원은, 자꾸만 어긋나는 타이밍이 하루하루 늘어갈수록 물을 마시지 못한 식물처럼 기운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이, 이거는 너무 억까잖어. 차가운 강의실 책상에 볼을 대고 우는소리를 내는 형원이 맥도 없이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렸다. 선배, 커피 사갈까요? 며칠째 돌아오지 않는 답장이 야속했다. 애간장이 탔다. 먼저 한 번 더 보내볼까.

“요즘 왜 그러냐, 채형원.”
“아오, 씨. 깜짝이야.”
“너 요새 왜 수영장 안 와? 사랑이 식었냐?”

  정훈의 말에 형원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 내가 현우 선배 좋아한다고 이 새끼한테 말했었나. 고민의 원천을 정곡으로 찔린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면 정훈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형원은 없는 기억을 찾아 머리를 박박 굴렸다. 어으, 모르겠다. 손현우 하나 신경 쓰는 것도 힘든데 얘한테 손현우에 대해 고민 상담을 했었는지 어쨌는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형원은 머리가 아파질 지경이었다. 타이밍 좋게 교수님이 들어왔다. 손현우와의 타이밍도 딱 이 정도였다면 좋았을 터였다. 형원은 생각을 멈춘 채 세워놓았던 태블릿의 화면을 터치하며 펜슬을 들었다.

  기나긴 강의가 끝나고 형원이 다시금 들여다본 태블릿 위로는 아무렇게나 그은 물결 위로, 또 아무렇게나 그린 수영하는 (아마도) 손현우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오늘 수영장을 가, 말어. 고민하면서 저도 모르게 끄적인 글씨 위에 마구잡이로 빙빙 둘러 그린 동그라미가 몇 겹이나 쌓여있었다. 이번에도 수영장에 형이 없으면 어쩌지. 정훈이 형원의 팔을 툭 쳤다. 그래서 오늘은 갈 거야, 말 거야. 형원이 길어지지 못한 생각을 갈무리하며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갈 거야. 가.

  매일매일 오르내려서 이제는 꽤나 체력이 붙어버린 형원이 초반보다 힘들지 않게 올라가는 체육대 언덕에서 정훈과 쓰잘데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현우와 딱 맞닥뜨렸다. 형원은 반가움에 저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어, 형. 하고 손을 번쩍 들었는데, 현우는 급한 연락이라도 온 듯 주머니서 휴대폰을 꺼내 들어 귀에 대었다. 형원은 벙찐 채로 먼저 올라가는 정훈을 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형원은 보았다. 손현우의 귀에 닿을 때 반짝 켜지던 잠금 화면을. 통화하는 척을 했다. 제 인사를 무시하고.

  형원은 살이 익어가는 온도에도 잘도 한자리에 서 있었다. 정훈이 부르는 외침이 아득하게 들렸다. 형원이 고개를 돌려 정훈을 보았다. 야, 오늘 수영 안 가면 안 되냐? 술 존나 땡긴다.

“오늘 너무 달린다. 채형원.”
“니가 뭘 알어.”

  두 사람 옆에 소주가 두 병씩 사이좋게 놓였다. 형원은 술을 마시는 내내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선배, 요새 바쁘세요? 술기운을 빌려 보낸 연락에 현우는 한참 답이 없었다. 읽기는 일찍이 읽은 것 같은데. 전화라도 해볼까. 푸우. 술 냄새가 나는 숨을 크게 내쉰 형원이 차가운 술집 테이블 위로 옆얼굴을 눌렀다. 차갑다. 형원의 시린 마음만큼 차가웠다. 야, 바깥이 뭐가 그렇게 덥냐. 이렇게 추운데.

  기어코 터져 나오는 울음을 끝으로 술자리가 마무리되었다. 정훈이 데려다준다는 걸 한사코 거절했다. 그럼에도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결국 정훈에게 들쳐져 돌아갔다. 형원은 전부 짜증이 났다. 영문도 모른 채 제 지랄을 받아주는 친구에게는 몹쓸 생각이었겠지만, 형원은 내내 옆에 있는 사람이 정훈이 아닌 사람이기를 상상했다. 형원은 자꾸만 무거워지는 눈꺼풀 위로 둥둥 떠다니는 생각을 씹어 삼켰다. 한참 뒤에 돌아온 답장은 응, 좀 바쁘네. 겨우 이 다섯 글자가 다였다. 현우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나쁜 남자네. 어잉?




  현우가 하얀 반소매 티 위로 검은 백팩을 멘 채로, 언덕이 높아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체육대 뒤 쪽 흡연구역에 섰다. 원래도 자주 태우던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먹고 끊은 것도 아니라, 늘 가방 한편에 지저분한 잔재를 떨구며 굴러다니던 담뱃갑을 꺼냈다. 에엥, 선배 담배 피워요? 어어, 형원이는 안 피지? 아, 그거 뭐가 좋은거라구 펴요. 폐활량에 완전 안 좋지 않아요? 선배 수영도 함서. 무겁지 않은 가방의 구석에 뭉쳐있는 담뱃잎을 보며 쯔, 혀를 한번 찬 현우는 이내 외면하고 입에 담배를 한 개비 물었다. 잠깐 끊을까 생각은 했었다.

  고요하던 멀리서 점차 가까워지는 소리가 있었다. 발소리인가. 현우는 잠깐 행동을 멈추었다가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싸구려 지포라이터의 부싯돌이 제대로 돌지 않아 틱 틱 맥없는 소리만 냈다. 괜히 짜증이 치솟았다. 우연히 보게 된 정훈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대던 형원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몸은 괜찮나. 많이 마셨던 것 같은데. 벌써 며칠 전의 일을 아직도 놓지 못하고 되뇐다. 어울리지도 않게.

  잡생각을 하며 라이터에 신경 쓰느라 관심이 없던 발소리가 정확히 흡연부스 앞에서 멈춰 섰다. 두 사람? 현우는 대여섯 번 실패한 라이터와의 싸움에 미간에 힘을 주고 라이터를 노려보았다. 눈에 쌍꺼풀이 절로 지어졌다. 힘이 빠져 불도 못 붙인 담배를 재떨이로 사용되는 낡은 화분 위로 툭 던졌다. 다음엔 터보로 사고 만다, 내가.

“야, 정훈아. 너 요새 존나 이상해. 알어?”
“야..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흡연부스를 그대로 나가려던 현우의 발목이 묶였다. 얇은 플라스틱 흡연부스의 벽 하나 너머에 채형원이 있었다. 심지어는 그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현우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했다. 결코 눈치가 없지 않은 현우에게 여러 가지 상황이 그려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현우는 그대로 몸을 뒤로 조금 물려 벽에 등을 기댔다. 백팩이 납작하게 눌렸다.

  도망칠까. 지금 나가면 안 들킬 수 있을까. 지금은 라이터에 불이 나올까. 상대는 담배를 안 피울까. 형원이는 어떤 얼굴로 사랑을 말할까. 형원이가 전하는 마음은 어떤 언어일까. 힘이 들어가는 턱에 근육이 움찔거렸다. 현우는 저항도 없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아버렸다.



  형원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손현우 하나 신경 쓰는 것도 벅차 죽겠는데, 요 근래 김정훈 이 새끼가 하는 행동이 이상했다. 수영장을 짼 날에 술을 과도하게 마셨더니 별안간 뛰쳐나가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 따위를 사 온다던가.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0고백 1차임에 도저히 이불 밖을 나설 수 없던 형원이, 겨우 하루 아프다는 핑계로 자체 휴강을 때리고 침대에 엎어져 울다 자다 반복한 날에 집까지 찾아와 문고리에 죽과 약을 사다 걸어두고 간다던가. 대가리에 총 맞았나. 염병, 왜 꼬시려는 손현우는 멀리멀리 도망만 치고. 형원은 또 찬물을 마시다 울었다. 인생이 기구해서 살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슬슬 정훈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거리를 두면서 또 손현우 생각을 했다. 형도 이런 마음으로 나를 피했을까. 착잡한 마음에 마른 세수를 했다.


  야, 채형원. 얘기 좀 하자. 형원은 피곤했다. 표정이 없을 때에는 유독 차가워 보이는 형원이 억지로 웃지 않고 눈만 굴려 제 옆자리에 서 있는 정훈을 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 고갯짓을 했다. 앞장서라고.

  정훈을 쫓아간 곳은 사람이 드문 흡연구역 근처였다. 햇빛이 뜨거우니 흡연부스가 내려둔 그늘 아래에서 대화를 하게 되었다. 정훈이 삐딱한 자세로 형원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야, 요즘 너 왜 나 피하냐. 절로 나는 한숨을 막을 새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깊은숨을 내쉬었다. 내가 언제. 그냥 좀 바빠서….

  아, 씨. 손현우가 떠올랐다. 형원은 제가 지금 그 말을 해버리면 정말로 손현우가 제 마음을 눈치채고 도망 다니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아서 말을 멈추었다. 좀 열이 받았다. 이번 여름은 왜 이렇게 뜨거워서는.

“야, 정훈아. 너 요즘 존나 이상해. 알어?”
“됐고,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마 정훈일 것이다. 숨김없이 얼굴을 구긴 형원은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다. 빙빙 돌리는 짓은 손현우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이 기세로 현우에게 직접 찾아가 붙들고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다짐했다. 꼭 언젠가 현우가 수영장 대신 강의실을 누비며 저를 찾아다녔던 날처럼.

“정훈아, 너 나 좋아하니?”

  정면 승부다. 아무래도 좋게 끝내기는 글렀다고 생각한 형원이 드물게 난 땀에 젖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헤집어 쓸어 올렸다. 물기 탓에 저들끼리 얽혔는지, 평소처럼 부드럽게 돌아오지 않고 뒤집어진 모양새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유연하게 찌푸려지는 눈썹이 훤히 드러났다. 이내 들려오는 정훈의 말에 힘이 들어간 눈썹이 위엄을 잃고 그대로 풀려 추욱 늘어졌다. 가관이었다.

“야, 너도 나 좋아하잖아.”
“뭐 이 새끼야?”

  어느 쪽으로 돌아가야 둘을 마주치지 않고 벗어날 수 있을까. 정훈과 형원의 대화가 조금씩 깊어지고 심상치 않아져서 현우는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형원의 마음도, 고백하는 말도 궁금했지만 그 이상으로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멋대로 좋아하고 멋대로 상처받는 것도 참 찌질해 보여서, 알량한 자존심이 차라리 도망치라고 속삭였다.

“정훈아, 너 나 좋아하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기대고 있던 등을 조용히 일으킨 현우가 살금살금 까치발을 들고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아주 달려 나갈까. 달리기로는 자신 있었다. 그러기로 마음먹은 현우가 쿵쿵 뛰는 심장으로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야, 너도 나 좋아하잖아.”

  뭐 이 새끼야? 발을 한걸음 딛자마자 현우의 귓전을 때리는 언성 높은 형원의 목소리에, 현우는 그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야, 나는 현우 선배 좋아해. 이 미친놈아!”

  터억.

  순식간이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급히 뻗어지는 발에 힘을 주어 땅을 디딘 현우와, 화가 난 얼굴로 소리를 지르다 흡연부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인물에 절로 시선을 빼앗긴 형원의 눈이 마주친 것은. 그리고 숨 막히는 정적.

“어…. 안녕?”



  정훈은 휴학을 했다. 나쁜 놈은 아니었다. 형원이 저를 좋아한다고 착각해서 저도 모르게 형원을 좋아한다고 과몰입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현우와 강제로 삼자대면을 하게 된 순간에 알았단다. 현우를 보고 적잖이 당황해서 목덜미가 시뻘게지던 형원을 보니 알겠더라고, 휴학계를 내며 형원에게 사과를 하고 갔다. 형원은 킁, 콧잔등을 찡그리며 으쓱였다. 현우와 통화하며 그 이야기를 전달했다. 현우는 웃었다.

  그리고 형원은 넌지시 말했다. 그으, 선배. 현우는 무언가 아는 사람처럼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가, 조금 느리게 대답했다. 응. 선배애. 응. 그래서 있잖아요, 우리. 휴대폰 너머의 현우가 또 잠깐 말이 없더니 형원을 불렀다. 형원아. 어, 네?

- 만나서 말해줄래?

  형원은 그 말의 뜻을 곧 이해했다. 형원의 입가가 예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공기 섞인 웃음이 가볍게 터졌다.

“제가 뭔 말할 줄 알구요?”
- 몰라, 인마.
“에이, 거짓말.”
- 어쭈.
“빨리 만나요.”
- 어. 금방 만나자.


[형원아.]
[도착했어?]

  현우의 연락에 형원은 은근히 차오르던 불쾌지수를 뒤로하고 빙긋 웃어버렸다. 입술을 얇게 눌러 입꼬리를 늘리면, 말랑한 볼이 밀려 볼록 올라갔다. 연락에 대한 회신을 위해 몸을 움직이다가, 문득 휴대전화 너머로 일렁거리다 못해 지글거리는 것만 같은 도로를 발견하고는 잠시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뜨거운 공기가 춤을 추며 위로 피워내는 아지랑이를 보고 있노라면, 형원의 속이 속절없이 함께 흔들렸다.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꺾이는 빛의 굴절은, 커다랗고 무거운 물체를 던졌을 때 일어나는 물의 파장과 닮아있었다. 형원은 열기를 보고도 물결을 떠올린다. 그 수면 아래에 있던 현우의 목소리가 형원의 이름을 불렀다.

“많이 기다렸어?”
“우와, 선배. 땀.”

  여름에 약한 현우가 형원이 기다릴까 헐레벌떡 온 것이 보였다. 형원은 그 사실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오늘 31도래. 어우, 덥다. 얼른 시원한 커피숍 들어가자. 현우가 민망한 티를 내며 턱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괜히 형원을 재촉하는 손짓에 형원은 한껏 양 볼을 올리며 현우의 손을 잡았다.

“좋아해요.”
“엇, 지금, … 지금?”
“선배, 나랑 연애해요.”

  현우가 허리를 숙여가며 웃었다. 형원도 웃음이 터졌다. 둘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숙인 상체를 드는 현우와 눈이 마주친 형원이 쑥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현우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얼굴을 기댔다. 현우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둘의 손가락이 얽혀, 서로를 꼭 붙들었다. 도심 속이 꼭 시골의 한적한 거리같이 느껴졌다.

  흐물흐물 녹아가는 한 여름이 정신없이 지나간다. 선배, 방학에는 뭐 할 거예요? 글쎄, 여행 갈까. 나 두고? 같이 가야지. 소란한 공간에 단둘뿐인 고요한 세상. 작열하는 태양 아래 두 사람의 얼굴은 피부가 익는 줄도 모르고 환하기만 했다.


  아지랑이 너머로 두 사람의 발걸음 속도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