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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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시작할 때는 데뷔를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냥 문득, 마침, 그 순간에 봤던 가수가 멋있어 보여서. 막상 시작해보니 춤 추는 것도 재밌었다. 그래서 했다. 근데 회사에서 나올 즈음에는 정말로 데뷔가 하고 싶었다. 꽤 긴 연습생 시절을 보내고 조급해질 때쯤 암암리에 데뷔조라고 불리는 그룹에서 리더격인 사람이 저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걸 알았다. 사회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이미 스물둘이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답이 안 나왔다. 진로에 대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론은 회사를 옮겨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나왔다. 데뷔하려고.

 회사를 나왔다고 당연히 바로 어딘가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고, 그래서 우선 속하게 된 게 댄스 크루였다. 갑자기 달라진 환경과 만나는 사람들 수가 달라졌다. 새로운 환경에서 오는 새로운 자극은 조금 재밌기까지 했다. 자신이 상상했던 순간과는 조금 달랐지만, 아마추어일지언정 무대에 서는 경험은 무대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현우를 안주하게끔 만들었다. 어쩌면 데뷔를 하는 게 운명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운명을 믿는 성격은 아닌데 그 시기에는 삶이 자꾸 운명에 매달리게끔 만들었다.

 생각보다 크루의 객원 멤버로 함께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주위 댄서 형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냥 댄서로 전향하는 건 어때? 마음속 한구석 조그마한 틈에 점차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그때 만난 게 형원이었다. 현우보다 두 살 어린 배우 소속사의 연습생. 아이돌을 하고 싶어서 춤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들었다. 그 정도 정보만 듣고 갔던 자리에서 쟁반으로 머리를 후려맞은 듯했다. 너무 잘생긴 바람에 잘생겼다는 인식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외계인인가봐. 댄서 형이 들어오는 문턱에 서서 멍하니 서 있는 현우의 손을 잡아 끌었다.

"여기가 손현우. 원래 대형 소속사에서 데뷔조였는데 댄서로 전향했어. 네 선생님으로는 최적일 거야."

 데뷔조였던 적도, 댄서로 전향한 적도 없다. 크루에 이제 막 들어온 동생의 자존심을 위한 거짓말인지 혹은 나름 그 씬에서의 상품성을 위한 건지 아직 가늠이 잘 안됐다. 여전히 맹한 얼굴을 한 현우에게 형원은 넉살 좋게 아, 네네. 현우쌤.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채형원이에요."

"최 아니고 채예요. 야채 할 때 채."

 그렇게 형원과 처음 만났다.

 형원과의 연습은 현우에게 꽤 큰 자극이 됐다. 냉랭하게 생긴 얼굴과 다르게 현우에게 먼저 손을 내밀던 모습도 그랬지만, 의욕이 전무해보이는 얼굴로 형원은 오디션을 80번 넘게 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로는 오디션 떨어지고 펑펑 울었던 적도 있다는 얘기를 우스갯소리처럼 했다. 그 말을 하는 모습이 빛이 나서 눈이 멀 것도 같았다. 형원을 보며 이런 게 사람들의 이목을 이끄는 힘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현우는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는지 생각했다.

 현우는 원래 제가 하던 대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돌아가서 기본부터 다시 시작했다. 느리게, 그리고 꾸준히. 비뚤어졌던 스물둘의 패기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형원을 다시 만난 건 몇 계절이 지난 후였다. 제대로 인사하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 헤어졌던 마지막과는 달리, 같은 회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땐 반가운 마음에 뭐야? 하는 추임새가 절로 튀어나왔다. 상황도 훨씬 나아져 있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연습생들 사이에서는 인지도나 선호도가 꽤 높은 회사에서 연습생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지옥 같은 서바이벌이 지나고 나서도 계속해서 형원과 마주할 수 있음이 좋았다.

 데뷔팀이 꾸려진 후에 현우는 여전히 느리고 꾸준하게 움직였다. 형원을 만나고 제자리로 돌아온 순간부터 쭉. 그렇게 제 페이스대로 움직이고 있으면 어느새 형원이 옆에 와있고는 했다. 연습실은 종종 둘만의 공간이 되었다.

 형원은 언제 왔냐는 듯 연습실에 들어와서 철퍼덕 앉아서 현우를 빤히 쳐다봤다. 나뭇잎에 납작 붙은 개구리처럼 가만히 보고 있으면 현우가 하던 동작을 멈추고 형원을 바라보는 것이 루틴이었다. 그러면 형원은 하루를 마무리하듯 일상을 주절댄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알 수밖에 없게 된다. 연습실에 들어오기 전에 문 앞에서 긴장하듯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라거나, 눈에 뭔가 들어간 것 같다며 다가올 때 빨개지는 얼굴 같은 것들. 간혹 본인도 모르게 떠는 손이나, 칭찬을 넉살 좋게 받아들이는 것 같으면서도 배시시 웃는 표정 같은 것들까지.

 그러니까 귀 끝이 빨개진 채로 형원이 연습실 바닥에 앉아있는 이 순간도 그런 것들과 비슷한 거였다. 간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위잉거리며 시끄럽게 돌아가는 연습실 공기청정기 소리와 섞였다.

"와, 이 노래 진짜 오랜만이다."

 형원은 웅웅거리는 소리에 묻힐 것도 같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형이 제 춤 선생님이었을 때 우리 이 노래로 연습했던 거 기억나요? 안무도 짜고."

 형원이 순식간에 과거를 가져왔다. 나 연습하던 것 중에 이게 젤 힘들었잖아요. 춤도 춤인데 짜는 게 진짜 어려워가지고. 현우도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갔다. 너 다른 건 잘하면서 이 동작 진짜 안됐었는데. 그 말에 형원이 키득키득 웃었다.

"이 동작 너무 안돼서 하다가 때려치고 집에 갔었는데... 알아요? 형 몰랐죠."

"여기가 계속 똑같이 미스가 나는 거예요. 근데 어떤 날은 그게 너무 화가 나가지고."

 그래서 그 순간도 현우는 알 수밖에 없었다.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과는 다르게 상기된 얼굴이라거나, 쑥스러운 듯 웃는 모습 때문에.

"근데 형은 안 그러니까... 그래서 전 형을 보면 좀 신기했어요."

 형원이 눈을 마주하고 배시시 웃는 모양에 무언가 쿵, 하고 내리 앉았다.

"형을 보고 있으면요,"

"저랑은 진짜 다르거든요."

"근데 또 어느 순간에는 또 느긋하고 느릿한 게 저랑 똑같은 것 같다가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묵묵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또 달라서."

 언뜻 들으면 노래 멜로디에 묻혀서 지나갈 수도 있는 말이었다. 오래된 연식의 시끄러운 기계 소리를 덮어버리기에는 너무도 작은 소리였다. 앞으로도 영영 모른 척 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 못 들은 척 넘겨버리려고 했는데.

"좋아해요."

 근데 그 네음절이 너무 크게 귀에 꽂혀서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형원과 빤히 마주하던 눈이 처음 봤던 그때처럼 빛을 내고 있어서 도저히 흘러가듯 넘겨버릴 수가 없었다.

"원래 그래 형원아."

 밑이 다 보이는 마음인 줄 알아서 불안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덜컥 겁이 났다. 들여다봤다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원래 그래. 오랜 시간 붙어있고 춤 연습 하다 보면 심장도 막 뛰고, 그러다 보면 원래 그렇대."

"제가 형을 좋아하는 게요?"

 대답은 못했다. 한참 정적이 흐르더니 형원이 양손으로 볼을 감싸고는 바닥에 발라당 누웠다. 형원의 이마에는 땀이 삐질삐질 나 있었다. 현우는 바닥만 쳐다보다가 슬쩍 형원의 얼굴을 봤다. 손으로 가려져서 한껏 붉어진 볼만 손가락 사이로 슬쩍 보였다.

 말없이 현우가 페트병을 건네주자 형원이 도로 자리에 앉아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거 봐."

 평소에 하지도 않던 타박을 했다. 덥고 목마르고 그러니까 그러지. 중간에 쉴 틈을 주지 않고 말이 이어졌다. 겨울인데 여긴 왜 이렇게 덥냐? 여기 문 좀 열자. 방금까지 고장 난 기계처럼 멈춰있던 현우가 바지런히 움직였다. 이 좁은 공간에서 동선이 뒤죽박죽 꼬였다.

"... 알겠어요."

 형원의 답에 뜸 들이던 현우가 물 좀 더 마실래? 하고 되물었다. 고개를 꾸닥이는 형원을 보며 아 나도 물 좀 마셔야겠다 하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현우가 연습실 밖으로 향했다. 방금 건 좀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하며.







 형원은 가끔 생각한다. 원래 그렇다는 말에 형도 그래요? 하고 물어볼 걸 그랬다고. 그렇다고 결과가 바뀌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형원은 한 치 앞을 못 보고 호기롭게 던져버렸던 그 고백을 생각하면 가끔은 좀 부끄럽기도 했다. 오히려 이제는 현우의 결정을 이해한다. 사실 이해하게 된 지는 오래다. 자려다가 그날이 생각난 탓에 이불을 수만번 발로 찼다. 숙소에서 같은 방을 쓰던 때에는 문득 그날의 고백이 벼락 내리치듯 생각나서 당사자를 옆에 두고 허공에 발차기도 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그때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때라면 더욱 생생하다. 그치만 알고 있다. 만약 그때 받아줬더라면 지금까지 함께 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 때로부터 계절이 십수번 바뀌었다. 스물둘의 채형원은 서른이 되었다. 그 시절을 보내는 동안 이렇게 둘이서만 활동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유닛 활동이 끝나고 쫑파티 겸 회식까지 끝나고 조수석과 뒷좌석에 앉아있는 지금까지도 얼떨떨했다. 과거로 돌아가서 말해줬어도 믿지 않았겠거니 싶다.

 누구의 핸드폰이 연결되었는지도 모르는 회사 차량의 카 오디오에서 우연찮게 그날의 노래가 쭉 흘러나왔다.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하던 단호한 현우의 얼굴도 함께 떠오른다. 저만 어렸던 줄 알았던 시절이 지나, 지금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아있는 더운 연습실 속 상기된 얼굴은 둘 다 앳되다. 몇 달을 지켜보며 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때마다 어릴 적 자신의 패기에 대한 부끄러움과 대단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차량 뒷자리에 앉아있는 얼굴을 보려고 슬쩍 몸을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현우는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고백한 이래로 정색하는 얼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또 그날처럼 고백한다면 현우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여전히 그때의 채형원과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할까. 서른의 채형원은 스물둘이던 때보다 겁이 조금 많아졌고 사랑이 조금 더 깊어졌다.

 굳은 얼굴을 다시 볼 생각을 하면 겁이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퇴할 생각은 전혀 없다.